[인간탐구]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 저자 정두언

"총리 18명 모신 비망록인 셈이죠"

전(前) 총리정무비서관실 국장 정두언(44. 한나라당 서대문을 지구당 위원장)씨는 요즘 홧술을 마시고 있다. 약 2주전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라는 책을 냈는데, 소재가 소재이니 만큼 초광속으로 반응이 오는가 싶더니, 급기야 '최악의 유명세'를 치렀다.

며칠전 모 잡지의 인터뷰때 너무 시간에 쫓겨 서둘러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똑같은 내용이지만 상당히 원색적인 표현으로 기사가 실렸다. 곧바로 언급된 당사자 측근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자신이 봐도 당연한 결과였다. 기자에겐 화가 나서, 당사자에겐 죄송해서 며칠째 연일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총리보다 기자가 더 무섭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항의하는 것에 대해 이해합니다. 비난도 감수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처음 책을 쓸 때도 많이 망설이고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모욕을 주자고 꺼낸 얘기가 아닙니다. 공무원직에 있을 땐 공무원이란 신분 때문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지만, 비효율적인 행정조직의 문제점에 대해선 누구라도 한번쯤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공무원 생활 19년동안 총리 비서실에서만 15년

행정고시(제24회) 출신인 정씨는 1980년대초 정무장관실 근무를 시작으로 문화체육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 국무총리 비서실 등에서 19년간 일했다. 그중 총리비서실에서 근무한 기간만 약 15년.

제 5공화국 진의종 총리부터 현 정부 제 32대 박태준 총리까지 총 18명의 국무총리를 모셨다. 평균 재임기간으로 치면 고작 1년 남짓. 그가 공개한 것은 그간에 지켜본 소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허탈한 군상들이다.

그가 익명을 고집하는 몇가지 예부터 말한다. 고위관직으로부터 출발해 한때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됐던 한 총리는 내용보다 치장에 몰두하는 거품 그 자체였다.

대통령과의 대화 자료를 작성할 때도 내용은 제쳐두고 글자 크기나 모양을 고치는데 온 정력을 쏟았다. 사소한 일에 목숨걸기로 치면 화려한 군ㆍ관ㆍ재계 경력으로 늘 자화자찬이 요란했던 한 총리가 더 '엽기적'이다.

언젠가 배가 침몰해 많은 사람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사태수습 대책은 제쳐두고 시체가 발견된 장소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갑판에서 나왔는지 선실 어디에서 나왔는지 사체 발견장소별로 분류해 달라고 주문해 직원들을 아연실색케 한 적이 있다.

베스트셀러 저자로도 유명한 명문대 모 교수는 5,000만원을 주고 청소년 의식구조 조사용역을 맡겼더니 500만원을 리베이트로 보내와 돌려보낸 일이 있다. 의뢰한 기한도 한참 지난 뒤 겨우 용역결과가 나왔지만, 쓰레기통에나 들어가야 할 엉터리였다. 그 교수는 이후 장관을 거쳐 총리로 부임했다.

집무실 안의 풍경도 10인 10색이다. 진의종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집무실 집기 배치를 북향으로 바꾸었다. 소위 '임을 향한 자세'였다. 나중에 재임중 중풍이 온 것도 북향으로 앉은 것 때문에 기의 흐름에 문제가 생겨 그렇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제 5공화국 마지막 총리였던 김정렬 총리는 전형적인 군출신답게 매사가 시계처럼 정확했다. 퇴임무렵 꼬냑잔 몇 개를 부인이 집으로 옮겼다가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김 총리의 불호령이 떨어져 부랴부랴 원위치 된 적도 있다.

이현재 총리는 말로만 듣던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의 단벌신사에다 자식들에게도 절대 관용 차량을 이용하지 못하게 했다. 상하를 막론하고 워낙 예를 깍듯이 지키다보니 간혹 영(令)이 서지 않는 경우까지 생겼다.

강영훈 총리는 책상안에 사표를 넣어두고 일했다.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실제로 재임중 세 번이나 사표를 제출한 바 있다.

당시 체육부장관이 북한에 가서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을 땐 공관으로 부른 뒤 바깥에까지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혼을 낸 일이 있다. 단호하고 개성이 강하면서도 속정이 깊었다.

황인성 국무총리는 역대 총리중 직원들을 가장 힘들게 한 주인공. 공관입주시 오래된 카펫을 바꾸는 것을 보고 예산을 낭비하면 안 된다며 원래의 카펫을 고집해 결국 이전 것대로 다시 교체하느라 오히려 예산 700여만원이 더 날아갔다.

대통령이 칼국수를 먹으니 본인도 수제비를 먹겠다고 해, 직원들까지 덩달아 수제비집을 드나들어야 했다.

또 그때까지 주문식 뷔페식으로 하던 모든 행사의 음식준비도 예산을 절약해야 한다며 직접 조리하는 것으로 바꿨는데, 공관원들은 공관원들대로 밤낮없이 고생만 하고, 새 그릇과 테이블 등을 장만하느라 예산은 예산대로 또 낭비였다.

지정했던 행사장소도 수시로 변동해 삼청동에서 본관으로, 다시 삼청동으로 되옮기는 등 한번에 세 차례까지 헐레벌떡 옮겨 다닌 소동도 있다. 나중엔 아예 양쪽에 모두 음식을 차려놓는, 공관원들 나름대로의 '완벽수비'까지 나왔다.

취임 때부터 퇴임 때까지 대통령의 문안전화를 빠짐없이 챙기는 것은 물론, 전직 총리에게만 보내던 종전 선물 관행과는 달리 청와대 부속실 직원들 선물까지 일일이 챙겨보냈다. 청와대에서 온 전화를 받을 때면 "예, 각하"라며 몸까지 굽혀 직원들이 민망해하기도 했다.

정원식 총리는 몹시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으로 옷이나 일상용품, 음식까지도 특정 물품을 세세하게 챙겼다. 이홍구 총리는 마음이 너무 좋아 아랫사람들에게도 미안해서 일을 잘 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수줍음이 많아 심지어 일하는 아주머니도 직접 말로 부르지 못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공무원 재직기간 '반란'을 꿈꾸던 때도

문서 소모전은 행정부에서만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국회의원들 역시 피장파장이다.

특히 대정부 질의 때면 묻는 사람이나 답변하는 사람이나 서로 아랫사람이 작성해준 자료로 묻고 답하는 웃지 못할 '쇼'가 벌어진다.

그나마 잘 읽으면 다행이다. 남편 대신 국회에 진출했던 한 여성의원은 지독한 사투리와 함께 원고의 쉼표, 마침표도 제대로 끊어 읽지 못해 발언 내내 좌중을 복장 터지게 한 적이 있다.

한화갑 의원과 홍사덕, 김동길씨는 그 반대 케이스다. 뛰어난 연설솜씨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홍사덕씨가 연설에 나서면 그때까지 의자를 뒤로 한 채 잡담을 나누던 의원들도 어느새 의자를 똑바로 돌려앉으며 숨을 죽였다.

김동길씨는 더 고수. 의원들이 의자를 돌리고 잡담을 그치며 조용히 경청할 뿐만 아니라 고개까지 앞으로 쑥 내밀고 귀를 기울였다.

'말씀자료'를 소화해내는 능력으로는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단연 으뜸이었다. 미리 작성된 '대본'을 읽으면서도 전혀 읽는 표시가 나지 않게 자신의 이야기처럼 소화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심지어 동네 헬스클럽 회원들과의 사적인 식사 자리에까지 '말씀자료'가 올라가야 했다.

"오래전 장기간 약사파업으로 시끄러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때 대통령의 지시로 총리까지 나섰는데, 마침내 파업을 풀기로 타결을 본 날이 마침 토요일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음날인 일요일엔 약국이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자기의 성과를 빨리 홍보하고 싶은 총리는 직원들에게 당장 다음날 문을 연 약국 수를 조사해오라는 겁니다. 파업 전에도 문을 열지 않던 약국이 그날이라고 문을 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말씀을 드려도 무조건 해오라는 겁니다.

결국 그게 별 소용이 없자 그럼 과거의 통계라도 뽑아와서 비교하라고 해서 한바탕 직원들이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할 때면 정말 내가 이런 일을 하면서 월급을 받아도 되는가, 스스로 한심스러울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발언외에도 정씨는 재직중 이미 몇 가지 '반항'의 전력을 갖고 있다. 그 개인적으로도 이력이 화려하다면 화려하다 할 수 있다.

양복을 제복처럼 입는 천편일률의 공무원 군단 속에서 토요일이면 빨간테 안경, 노타이, 멜빵바지 차림으로 활보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굳이 끌어다 붙이자면 기질부터가 '공무원표'가 아니었는지 모른다.

경기고와 서울대 무역학과 재학시절 문학과 연극에 심취했던 낭만파였다.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무대에 올리기도 했고, 대학내 록그룹을 결성해 한때는 무대에서 비지스의 노래를 열창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도 프랭크 시나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4ㆍ13 호헌조치가 있었을 땐 너무나 화가 나 정부종합청사 옥상에 올라가 독재를 반대하는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 생각까지 하다가 구상단계에서 무너졌다.

대신 어느날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그날의 금언을 메모처럼 붙여두는 공간에 난데없는 전두환 대통령의 '말씀'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다. 함께 탄 동료외에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종이를 찢어버린 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같이 내뺐다. 공무원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그에겐 가장 '과격한' 반독재운동이었다.


직업 바꾸려 탤런트 시험 보기도

직업을 바꾸려고도 했다. 1주일 휴가를 받은 뒤 가족 몰래 KBS 탤런트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 '토지'라는 대하드라마의 출연자를 뽑는 공모였다. 연기와 카메라테스트 등 총 5차에 걸친 테스트중 4차까지 무난히 통과했다. 최종면접만을 남겨둔, 사실상 합격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중대한 시점에 친구가 가족에게 일러바쳤다. 어느날 저녁 집에 들어가보니 아내를 비롯, 처가 식구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당신이 여자 탤런트랑 뽀뽀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아내의 결사반대로 다음주 얌전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30세 때의 얘기다.

미루고 미뤘던 사표를 결국 지난해에 꺼냈다. 1년만 더 참았어도 연금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시점이었다.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다. 반대할 틈도 없이 재빨리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공천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당선자와 약 2,000표 차이. 퇴직금이며 살림이 완전히 산산조각났다. 집이나마 간신히 붙든 게 천만다행이다. 충격으로 한달간 드러눕기도 했다.

"그래도 선택에 대해 전혀 후회는 없습니다. 더 이상 누구의 뒤치다꺼리가 아니라 온전히 제 이름 아래 제 의지와 소신대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욱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공무원 시절엔 공무원 같지 않다고 주목을 끌었던 그는 정치현장에 뛰어든 요즘 도리어 '공무원 티가 난다'고 면박을 당하는 중이다. 이따금 취재 나온 카메라맨들까지 "표정이 공무원 같다"며 아픈 곳을 또 찌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앞으로도 공무원 조직을 완전히 떠나지 못할 것 같다. 신분은 바뀌었지만, 행정평론가로서 외곽을 지킬 뜻을 갖고 있다. '최고의 총리, 최악의 총리'는 그 1탄에 불과하다.

한편에선 국민대 행정학 박사과정도 충실히 밟고 있다. 사표를 내던 무렵 찍었을 명함판 사진을 보니 1년 사이 얼굴 살이 홀쭉하게 빠져 있다. 세종로에서 붙은 군살이 이제야 내리는 듯 싶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6/0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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