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이순신’과 ‘칼의 노래’

21세기의 첫해가 저물어가는 11월 19일은 충무공 이순신 순국 403주기가된다. 누가 뭐래도 신문학의 으뜸이라 믿는 춘원 이광수는 충무공이 돌아간 지 334주년이 되던 1932년 4월 3일 동아일보에 연재중이던 소설‘이순신’을 끝냈다. 그때 춘원의 나이는 40세였다. 그의 연재는1931년 5월 30일에 시작됐었다.

한국일보에 ‘문학기행’을연재했던 문필가인 김훈은 5월 11일 “소설 이순신-충무공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라는 소설을 ‘칼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썼다. 김훈은 56세다.

이 칼럼(5월31일자)에 소개했던 ‘알몸박정희’에서 저자 최상천 전 효성카톨릭대 교수는 춘원의 ‘이순신’에 대해 30여 쪽에 걸쳐 색다른 비평을 하고 있다. 최 전교수는 지금 50세다.

또 6월 3일 일요일 아침 서울 광화문 충무공 동상에 오페라 ‘이순신’의대형 광고 포스터가 걸렸다가 저녁무렵에 철거됐다. 그 내용은 “왜곡시킬 수 없는400여년전의 승전. 로마에서 성공하고 돌아온 오페라 ‘이순신’”이었고, 포스터는 동상의 기단(基壇)부를 완전히 덮었다.

이보다 앞서 5월 20일에는 환경운동연합의 한회원이 고가사다리로 동상의 얼굴까지 올라가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이라는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경찰은 문제의 두 사람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은 물론 포스터를 걸기 위해 세종로를 무단횡단했다며 도로교통법 위반혐의등으로 불구속 입건했다. 어느 신문은 두 사건을 보도하며 제목을 “충무공:귀찮아 죽겠어”라고붙였다.

과연 충무공은 그렇게 느끼고 있을까.

춘원은 11개월여를 연재한 소설 마지막 대목에 이렇게 썼다. “나는충무공이란 말을 싫어한다. 그것은 왕과 그 밑의 썩은 무리들이 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 바로 앞에는 일제가 1931년 만주 침공을 앞두고 보도 검열의 칼날을 강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춘원으로 하여금 이소설을 쓰게 했는지 그 이유가 요약되어 있다.

“순신의 유해는 고금도(진도군, 우수영 앞 수영) 본영으로갔다가 아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순신의 상여가 지날 때에 백성들은 길을 막고 통곡하였다. 왕도 어려운 한문으로 제문을 지어 조상하고 우의정 선무공신 일등을 책하였다.

원균(경남 수군 우절도사 이순신 하옥 후 3군 통제사)은 삼등이었고 권율(도원수, 행주산성 승리자)은 2등이었다. 그러나그까짓 것이 무엇이 그리 긴한 것이랴. 오직 그가 사랑하던 동포의 자손들이 사당을 짓고 제향을 지냈다.

그때에 적을 보면 달아나거나 적에게 항복한무리들이 다 정권을 잡아 삼백년 호화스런 꿈을 꾸는 동안에 조선의 산에는 나무 한 포기조차 없어지고 강에는 물이 마르고 백성들은 어리석고 가난해졌다.

그가 돌아간 지 334년 4월 2일 조선 오백년 처음이요 나중인 큰사람, 이순신의 슬픈 인생을 그리는 붓을 놓는다.”

춘원의 ‘이순신’을김훈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 가을 저널리스트의 펜을 접은 그는 새해 봄에 아산 현충사에 가 사당에 걸린장군의 큰 칼을 하루종일 쳐다봤다. 그 큰 칼중 검명(劍名)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고,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의 칼에 마음이 쏠렸다.

그는 스스로 이순신이 되어 하옥 후에 백의종군해서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의기간을 미학적으로, 감각적으로 읊었다.

김훈의 ‘이순신’은춘원의 장군처럼 사실적이지 않다. 김훈의 ‘이순신’ 죽음은 난해한 시다.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 기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고 김훈은 ‘칼의 노래’를맺으며 스스로 이순신이 되어 숨이 넘어가며 했던 말을 알쏭달쏭하게 웅얼거리고 있다.

“세상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일본 수군이퇴군하던 남해의 포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선문답같은 이 마지막 유언에 실체는 있다. 칼로 베어 지지 않을 적들은 지금의일본일 터고 관음포는 지금도 경남 남해군에 있다. “노을이 적들쪽으로…” 의 뜻은 일본이지는 해라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최상천 전교수는 춘원의 ‘이순신’에서는임금+간신+당파+조센징이 함께 뭉쳐 성웅을 죽인 망할 나라를 느끼게 한다고 비평했다. “민족자학(自虐)의식을 정신병적 경지까지 끌어올린 기획작품이요, 그 후 5ㆍ16 쿠데타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를 또 군사독재를 위해 악용했다”는것이다.

어떻든 충무공 이순신은 처음이요 마지막인 큰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슬프게 하지는말아야 할 큰사람임이 분명하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6/12 18:50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