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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본(62)] 자이니치(在日)

[재미있는 일본(62)] 자이니치(在日)

재일동포를 일본에서는 흔히 ‘자이니치’(在日)라고 부른다. ‘자이니치 간코쿠진’(在日韓國人)이나 ‘자이니치조센진’(在日朝鮮人)을 줄인 말이다.

정확히 국적을 구분하기 어렵거나 그럴 필요가 없을 때 편리하게 쓸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자이니치코리언’이라는 한영(漢英) 혼합의 묘한 말도 등장했다.

재일동포는 원래 국적이 없었다.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기 전 재일동포의 국적란에는 ‘조선’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이미 그런 나라는 없었다.

그저 일본인과는 다른 한반도 출신임을 나타낼 뿐이었다.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조선’이라는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88 서울올핌픽 이전까지는 절반 정도가 그냥 ‘조선’을 유지했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은 재일동포 사회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남쪽을 지지하는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민단)과 북쪽을 지지하는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조총련)는 갈등과 대립, 세불리기 경쟁으로 동포사회를 양분했다. 아니 3분했다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북한과 국교가 없는 일본은 북한 국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조총련계 동포의 ‘조선’ 국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즉 북한을 뜻하지는 않는다.

또한 조선적 동포 가운데는 북한이나 조총련과는 무관한 사람들도 많다. 개중에는 분단된 조국의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조선적을 유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국적을 갖지 않은 조선적 동포를 무조건 ‘조총련계’라고 못박는 것은 커다란 잘못이다.

90년대이후 많은 조선적 동포들이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었다. 해외 여행이 주된 동기였다. 조선적을 가진 상태에서는 여권을 가질 수 없다. 조총련 간부들 일부가 북한 여권을 갖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해외여행을 가려면 임시 여권에 해당하는‘도항(渡航) 증명서’를 발급 받지만 일본의 출입국 당국과 북한에는 통하지만 국제적으로는 거의 통용되지 않는다.

북한의 실상에다 현실과 동떨어진 조총련의 노선에 실망한 조총련계 동포들 가운데 한국적을 택하는 예가 크게 늘었다.

그 결과 현재 한국적과 조선적을 합쳐 68만명 정도인 재일동포 가운데 50만명 가까이가 민단계로 분류되고 있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계 일본인’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재일동포는 거의 1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재일동포는 이중의 차별대우를 받아 왔다. 일본의 국제화 진전으로 지금은 많이 개선됐지만 오랫동안 ‘부라쿠민’(部落民)과 함께 일본의 사회적 차별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학교에서는 ‘왕따’의 대상이었고 사회적 진출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서러움을 견디다 못해 어렵게 귀화를 해도 완전히 차별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98년 증권비리와 관련, 자살한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 의원이 좋은 예였다.

일부 재력가를 제외하고는 고국 동포들의 눈길도 차가왔다. 많은 재일동포는 과거 김포공항 시절에 겪었던 불쾌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입국 심사관의 물음에 우리말을 더듬거리거나 일본말을 하면 "한국말도 못하면서 무슨 한국사람이냐"는 핀잔을 받기 일쑤였다.

재미교포가 영어로 떠드는 것은 괜찮아도 재일동포가 일본말로 떠드는 것은 안 된다는 식이었다. 오죽하면 스스로를 비하하는 ‘똥포’라는 은어가 나왔을까.

이런 한일 양국의 차별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 사회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일본 전체 인구의 1%도 안되는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은 그 10배인 10%쯤은 된다.

‘파칭코’ 관련 산업과 ‘야키니쿠’(燒肉) 식당, 신발공장 등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탄탄한 경제 기반을 갖추었고 연예 체육 분야의 활동도 두드러진다. 일반적인 사회 진출의 길이 차단된 결과지만 그것이 거꾸로 ‘자이니치’의 존재 가치를부각시켰다.

물론 여전히 ‘자이니치’임을 숨기는 재일동포들이 많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서울에서 방어전을 가진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인 조총련계 홍창수 선수는 지금 일본 언론의 각광을 받고 있지만 지난해 오사카(大阪)에서 챔피언에 도전할 당시 어느 일본 TV도 이를 중계하지 않았다.

축구스타 나카타히데(中田英)는 “자이니치가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시달린 것이 이탈리아행의 중요한 이유였다.

식민지 시절, 더 멀리로는 1897년 사가(佐賀)현의 탄광 노동자에서 시작된 재일동포의 역사는 그 맥이 흐려지고 있다.

2세, 3세로 내려갈수록 동포로서의 정체성이 묽어지고 한국계 일본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재일동포 사이의 결혼 비율이 20%도 안되니 앞으로 다시 100년이 지나면 ‘도래인’처럼 옛날 얘기가 될 지도 모른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6/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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