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열풍, 다음엔 이시하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 정권의 탄생 이래 일본정치의 풍경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정계와 관계가 장기간의 사전 의사 조정을 거쳐 정책을 결정하고 총리는 형식적 추인에 머물렀던 것과 달리 총리중심의 정책 결정이 두드러지고 있다. 총리가 직접 여론의 동향을 읽어 정책을 결정하고 국민이 이를 곧바로 판단하는 대통령제식 정치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런 고이즈미식 정치는 국민의 높아진 정치 관심과 사상 최고의 내각 지지율을 바탕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역으로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정치 관심과 지지율을 끌어 올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요미우리(讀賣)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효고(兵庫)현에 사는 호스테스 '민트'(29)씨는 5월19일 '고이즈미내각을 응원하는 메일 매거진 JUN TIMES'를 창간했다.

2년전부터 연애전문 메일매거진을 발행해 온 그는 고이즈미총리 내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국민의 소리를 결집하려는 생각에서 전혀 다른 분야에 손을 댔다. 한달도 지나지 않아 정기구독이 3,300부에 이르렀고 매일 격려와 감상을 담은 E메일이 100건씩은 들어 온다.


식지않는 '고이즈미 신드롬'

고이즈미 신드롬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대중매체의 반응이다. 시사 주간지나 월간지는 물론 오랫동안 연예계 뒷얘기로 채워졌던 여성 잡지조차 정치를 다루기 시작했다.

주부들을 대상으로 연예계 소식과 시시콜콜한 사건의 뒷얘기를 주로 전했던 TV의 '와이드쇼'프로도 '고이즈미총리 인기로 자민당 본부에 주부와 10대 소녀팬 쇄도' 등의 준정치 소식을 전하기에 바쁘다.

5월 마지막주 민방이 주제별 주간 방송시간을 집계한 랭킹에서는 고이즈미내각 관련 소식이 10시간 16분으로 1위였다.

전철안에서 발을 밟은 데서 시작된 사소한 시비가 전철역 홈에서의 집단구타, 살인사건으로 이어진 '세이부(西武)선 사건'이 겨우 42분으로 2위에 올랐으니 고이즈미 열풍이 사회 현상으로 굳어졌음을 보여 준다.

고이즈미총리는 이미 인기 정상의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를 능가하는 인기인이다. 총리관저에는 전화와 편지가 쇄도, 가정부를 새로 고용해야 할 지경이다. 인터넷 홈페이지에 밀려 드는 E메일을 인쇄한 이면지는 매일 30㎝ 이상의 두께로 쌓인다.

취임 당시 사상 최고를 기록한 내각 지지율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게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취임 직후 언론사에 따라 78~87%를 기록했던 내각 지지율은 5월말의 조사에서 예외없이 2~4% 포인트 상승했다. 6월 들어 한 TV의 여론조사에서 91.4%까지 치솟아 놀라움을 던졌다.

지지를 밝힌 응답자도 결과에 놀라고 있고 상식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파벌 타파 등 자민당의 기존 정치 관행과 동떨어진 신선한 발상, 국회답변이나 기자회견에서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분명하게 소신을 밝히는 선명한 이미지 등이 변화에 목마른 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는 정도의 분석이 고작이다.

여성의 전폭적인 지지에는 개성적이고 깨끗한 용모를 갖춘데다 독신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취임 당시 약속한 경제 구조 개혁이나 행정 쇄신 등은 아직 구체적인 결과가 나올 시점이 아니다. 다만 '한센씨병소송' 항소 포기나 도로 특정재원의 용도 제한 폐지 선언은 적어도 일반 국민에게는 기득권과 무관하게 옳은 일이면 해낸다는 정책의지의 표현으로 받아 들여졌다.

국제적으로 격리 수용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된 후에도 오랫동안 한센씨병 환자를 강제 수용, 사회의 부정적인식을 뿌리깊게 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자행했다는 환자들의 주장을 일본 법원은 그대로 받아 들여 국가보상을 명령했다.

다른 국가보상 소송에 미칠영향이나 일부 무리한 법리의 적용을 막기 위해 일단 항소하고 화해, 형식적으로 패소를 피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관행이었다. 이번에도 항소 제기론이 대세를 이루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고이즈미총리가 항소 포기를 결정하는 극적인 반전으로 열광을 불렀다.


'제2의 메이지유신' 내세운 개혁

전통적으로 자민당의 돈줄이 돼 온 도로특정 재원의 용도 제한을 폐지하겠다는 선언도 자민당 정치를 외면하던 국민의 발길을 돌려 세웠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총리 이래 도로 정비, 보수에만 용도가 한정된 거액의 예산은 건설 토목 업계와의 유착의 커다란 요인이었다.

다나카전총리 이래 하시모토(橋本)파가 장악해 왔다는 점에서 정적의 목을 죄는 조치이지만 국민들은 그런 복잡한 내부 사정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당내 최대 파벌의 반발을 무릅쓴 고이즈미총리의 용기만 부각될 뿐이다.

이런 국민적 열광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고이즈미 열풍에서 불안과 위기를 느끼고 있다. 자민당내에서도 지나치게 높은 내각 지지율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야마나카 사다노리(山中貞則)의원은 "총리가 바뀐 것만으로 지지율이 한자리수에서 80%로 뛰는 것은 일본인의 부화뇌동 기질 때문" 이라며 "히틀러의 집권 당시가 떠오른다" 고 지적했다.

남들과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갖는데 불안을 느끼는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이 무조건 고이즈미 지지로 흐르고 있다거나 오랜 경제침체에서 비롯한 좌절감과 집단 히스테리가 고이즈미총리를 매개로 폭발하고 있다는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인기 위주의 대중주의가 제기하는 잠재적 전체주의의 위험은 고이즈미총리 스스로의 인식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스스로의 개혁을 '제2의 메이지(明治) 유신'이라고 내세우면서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은 모두 반개혁세력이라고 단정했다. 이분법적 흑백논리이다.


다나카 강상발언·대립 '모른척'

다나카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과 외무성 관료의 대립이 거듭되고 있는 가운데 관료들에게 밀려 들고 있는 비난 전화와 편지도 대부분 '다나카=고이즈미,다나카 반대=고이즈미 반대, 고이즈미 반대=개혁 반대'라는 단순 논리를 깔고 있다.

다나카장관과 외무성관료의 대결에는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불은 다나카장관이 먼저 붙였다.

취임 직후 내정인사가 존중되는 관례를 뒤엎고 이미 부임한 외교관을 원위치시키고 전면 인사동결을 선언, 외무성 관료의 높은 자존심을 깔아 뭉갰다.

'튀는 언행으로 대중적 인기를 끌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실력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외무성의 보편적인 분위기를 의식한 관료 길들이기였다. 외무성을 쥐고 흔들어 온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의원의 영향력을 차단, 하시모토파의 세력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었다.

또 외무성 고급 관료의 비자금금고였던 기밀비를 둘러싼 주도권 싸움도 변수로 거론된다.

그러나 장관이 국회에서 거짓말까지 해가며 관료를 비난하고, 직업 관료의 최고 지도자인 가와시마 유타카(川島裕)사무차관을 노골적으로 거세하려는 태도는 관료들의 조직적인 반발을 불렀다.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외교부장과의 전화회담에서 "앞으로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총통의 방일은 절대로 없을 것" 이라고 밝히거나 독일 이탈리아 호주 외무장관과의 일련의 회담에서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구상을 비난한 발언의 내용이 잇달아 언론에 흘러 나왔다.

다나카장관이 오보라고 부인하고 직무상 비밀 누설에 대해 처벌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서자 아예 회담내용 메모가 그대로 보도될 정도이다.

이런 대립과 갈등으로 외무성의 기능이 거의 마비될 지경이니 과거 같으면 자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일찌감치 외무장관이 경질됐다.

그러나 고이즈미총리는 이를 방관하고 있다. 늘 자민당내 1위를 기록해 온 다나카장관의 대중적 인기를 무시하기 어렵다.

또 외무성 관료, 나아가 하시모토파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다나카장관 이상의 맹렬 정치인이 없다. 싸움이 장기화하면서 대중이 다나카장관 격려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도 고이즈미총리의 방관을 부르고 있다.


일본정치 주도세력으로 떠오른 4인방

한편 일본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한 '4인방'의 성격은 고이즈미 열풍을 더욱 우려스럽게 한다.

자민당 총재경선을 앞두고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모리 요시로(森喜朗)전총리와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지사는 하시모토파 타도를 내세워 고이즈미총리와 손을 잡았다.

고이즈미총리 집권 이후 4인은 수시로 만나 국가 기본 정책을 논의하고 있으며 '고이즈미 개혁'이 실패해 실권할 경우 '이시하라 신당'을 발족, 이를 이어 나간다는 시나리오까지 만들었다.

전후 정치 총결산을 외치며 경제력에 걸맞는 정치 군사적 지위를 주장하고,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참배를 최초로 실현했던 나카소네 전 총리가 정신적 기둥이다.

'신의 나라' 발언의 모리 전총리는 물론이고 '제3국인' 발언의 이시하라 지사의 우파 색채는 완연하다. 고이즈미총리는 이념적 성향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검토에 의욕을 표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고집하는 등 다른 3명과 하등 다를 바 없음을 확인시켰다.

이런 점에서 고이즈미총리와의 직접 제휴, 4인방과 줄이 닿아 있는 다나카장관의 미국 비판 발언은 특히 주의를 요한다.

MD구상에 대한 일본 정부의 지금까지의 자세는 '이해한다'이다. 적극 동의할 수는 없지만 반대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어서 의문을 품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일안보체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 발언은 얘기가 다르다.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우는 골수 우익조차도 입에 담지 못했던 금기를 내각의 핵심인물이 거론했다. 당장은 반발과 비난을 부르고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혹시라도 계산된 발언이라면 고이즈미총리내각은 메이지 유신 이후 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걸었던 불행한 길의 입구에 들어서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과거와 같은 대외 침략은 현재 동북아의 현실상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릇된 집단의식으로 대외 대결 자세를 표방,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는 있다. 고이즈미 열풍을 보다 냉정한 눈으로 지켜봐야 하는 것도 집단 열기는 으레 판단의 오류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입력시간 2001/06/13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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