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4) 박세필 박사(下)

'배아연구는 생명공학의 핵심'

시험관 아기 시술에 쓰고 남은 냉동배아를 이용한 박세필 소장의 간(幹)세포연구는 아직 갈길이 멀다.

지난해 8월 세계처음으로 5년간 얼려두었던 냉동배아로 간세포를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간세포가 심장이나 뇌 등 인체의 장기로 성장하려면 어떤 성장인자가 어떤 비율로 작용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밝혀진게 거의 없다.

그나마 박 소장은 배양조건을 갖춘 배양접시안에서 간세포에 특수 성장인자를 주입, 심근경색증 치료에 유용한 심근세포로 키우는 실험에 성공해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다.

“배아에서 간세포를 만드는 연구는 전세계 수천개의 연구소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연구소는 손꼽을 정도지요. 특히 간세포에서 뇌 췌장 신경세포 등을 만들어가는 연구는 아직 시작단계에 머물고 있어 잘만 하면 우리 나라도 선진국처럼 앞서 갈 수 있습니다.

이 분야는 게놈 연구나 우주항공분야처럼 막대한 예산이 들지도 않습니다. 끈질긴 반복실험이 필요하지요. 0.1㎜ 크기의 배아에서 0.02㎜의 내부세포 덩어리(간세포)를 추출하는 미세한 실험에는 손동작이 섬세한 우리가 강하다는 이야기도 많아요.”


"배아연구 서둘러 특허권 확보해 놔야"

박 소장은 그래서 배아를 이용한 불치병 치료 연구조차 못하게 막은 정부의 생명윤리기본법(초안)이 마뜩찮다.

복제배아를 여자의 자궁에 착상하면 복제인간이 태어나는데 따른 위험성은 인정하지만 생명공학 연구의 싹마저 아예 잘라버리는 식의 입법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배아연구는 차세대 의학ㆍ생명공학에서 핵심분야인데 이를 금지하는 것은 머지않아 또 다른 기술예속을 불러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아복제의 허용 여부는선진국에서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배아복제를 이용한 인간복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게 세계적인 추세.

영국에 이어 미국과 캐나다도 얼마 전에 인간복제 금지법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그러나 인간복제를 위한 배아 복제와 연구를 위한 배아복제는 질적으로 다르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영국은 실제로 지난 1월에연구 목적의 배아복제 허용법안을 통과시켰다. 복제양 돌리를 탄생시킨 기술을 바탕으로 차세대 생명공학의 핵심이랄 수 있는 배아 복제 분야를 주도하기 위해 선택한 국가적전략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배아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배아연구를 서둘러 관련 특허권을 확보해 놓아야 앞으로 불치병 치료에 높은 로열티를 물지 않을텐데, 우리 정부는 그걸모르고 있어요. 선진국에 비해 복제 기술이 뒤떨어진 우리가 먼저 금지법안을 만들 필요가 뭐 있습니까? 선진국이 어떻게 하나 지켜보다가 뒤를 따라가기만해도 윤리적으로 욕먹을 일이 없습니다.”

복제기술이 선진국에 뒤떨어졌다지만 인간복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고 한다. 원래 소와 같은 동물을 이용한 불임연구와 복제연구를 계속해온 박 소장은 지금이라도 법만 허용한다면 인간 복제도 가능하다.

그는 이미 소의 복제 방법을 이용해 ‘엘리트 송아지’를 만들었다.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와 함께 우수한 소의 난자와 정자를 체외수정시켜 탄생시킨 엘리트 송아지는 세계에서 4번째다.

“난자은행에 보관된 우수 냉동난자와 시가 3억원으로 평가되는 한우 수소의 냉동정액을 해동한 뒤 체외수정시켜 다른 암소의 자궁에 이식하는 냉동체외수정 방법을 사용했어요. 형질이 우수한 엘리트송아지를 만들어내려면 일단 복제기술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맛과 육질이 더욱 좋아지고 부가가치도 높아지지요.”


냉동난자은행 설립

그는 한우의 개량에 관심이 많다. 원래 축산전공인데다 소 불임연구를 하면서 소와 함께 뒹군 시간도 많기 때문이다.

물론 초장기에는 어려움도 많았다. 소 연구를 하다 보니 우선 건강한 소의 난자를 구하기 힘들었다. 소의 도축 시간에 맞춰 도축장으로 달려가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도축장에서 소 피를 뒤집어 쓰면서 겨우겨우 난자를 채취한 뒤 급히 연구실로 돌아와야 했다.

인큐베이터에 빨리 넣지 않으면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서두르다보니 교통사고 위기도 적지 않았다. 지금 되돌아보면 어려웠던 시절의 추억이지만 그땐 왜 그렇게 난자 채취가 어렵고 불편했는지.

그는 후학들에게 이런 불편함을 넘겨주지 않기 위해 냉동 난자은행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정난은 냉동과 해동이 쉬운데, 난자는 미성숙체라 해동하기가 쉽지않았다. 지금은 냉동난자 10개중에서 8-9개는 살려낼 정도로 기술을 개발했다. 그의 실험실에는 1만5,000개 가량의 난자가 냉동보관돼 있다.

박 소장이 오랜 연구생활에서 가장 희열을 느꼈을 때는 90년초. 5년간의 긴 연구끝에 처음으로 체외수정란을 만들었을 때다.“난자를 키워 체외수정했는데, 5년동안 성공을 못했어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어느날은 잠을 자다가 수정란이 두 개로 짝 갈라지는(세포분열)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그토록 애절했던 연구성과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더 큰 경험으로 이어졌다. 1992년 미 위스콘신 대학에 도착한 뒤 1주일만에 수정란이 겉막을 뚫고 나오는 것을 보았던것.

그것은 충격 그 자체였다. 알고 보면 간단한 방법이었는데도 한국에서는 5~6년 매달렸어도 해내지 못했던것들이었다. “기술의 차이를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했다”는게 그의 솔직한 고백이다.


기초과학자들이 대우받는 풍토돼야

박 소장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은 기초연구에 대한 우리 나라의 무관심이다.

특허권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현재의 연구풍토에서는 무엇보다도 원천기술이 요구되는데,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기초 과학자들보다 응용 과학자들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 게 불만이다.

선진국에선 생명공학바람이 불면서 수의과와 낙농과 등 생명공학분야가 각광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연구결과를 임상에 적용하는 의사들이 더 대우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후학들에게도 할말이 많다. 그는 힘든 연구를 피하려는 풍토를 우선 지적했다. “소와 같이 덩치가 큰 동물의 연구는 이 분야에서 3D에 속합니다. 쥐 같은 것을 이용하면 간단히할 수 있는데, 왜 귀찮게 소를 대상으로 하느냐는 거죠. 가축이 크면 클수록 실험이 어려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도 뛰어들어야 합니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더 큰 기회가 오니까요.” 21세기 생명공학의 시대에 우리 모두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이진희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6/1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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