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종로구 숭인동(崇仁洞)

숭인동은 일제가 창지개명한 땅이름이다. 1914년 4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부제실시)을 개편한답시고 옛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을 각각 분해하여 그 첫머리 글자만 떼어서 합성한 것이 오늘의 숭인동(崇仁洞)이다.

숭인동에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에 얽힌 애달픈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숭인동의 동묘(東廟:중국의 관우, 관평, 조루, 주창, 황보를 모신 곳) 남쪽 청계천에는 언제부터인가 영미다리(潁眉橋)가 놓여 있었다.

단종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멀리 영월로 유배가는 길에 이 다리위에서 정순왕후와 눈물로 이별하던 곳이다.

그 이별이 단종과 정순왕후와의 영원한 이별이 될줄이야.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 영이별 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는 뜻으로 전해 오다가, 성종 때 살곶이 다리와 함께 이 다리를 스님들을 동원해 돌로 크게 놓았다.

그리고 성종이 친히 영도교(永渡橋)라 이름 하였다. 그러나 이 다리의 운명도 조선조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석대로 쓰는 바람에 영원히 사라졌다.

정순왕후는 부군인 단종과의 안타까운 이별을 하고는 오라는 데도 없고, 딱히 갈곳은 더더욱 없었다. 죄인의 부인이라 도성안에는 더군다나 들 수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찾았던 곳이 인창방(숭인동)의 낙산(駱山)기슭이었다.

정순왕후는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4살에 단종의 왕후로 책봉됐다.

그러나 겨우 1년 반의 신혼 생활 끝에 단종이 왕위에서 3년만에 물러나는(1455년 6월) 바람에 그해 7월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로 되었다가 그로부터 3년 뒤 단종과 생이별 하였다.

낙산 골짜기에 시녀 희안(希安), 지심(智心), 계지(戒智)와 함께 찾아 든 정순왕후는 영월쪽을 바라다 볼 수 있는 연미정(燕尾亭) 밑에 작은 초가를 짓고 정업원(淨業院)이라 하였다.

왕후는 날이면 날마다 아침 저녘으로 동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에 올라, 영월쪽을 바라다보며, 단종이 서울로 무사귀환하기를 기약없이 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산봉우리를 오늘날도 동망봉(東望峯)이라 부르고 있다.

‘임이 오시던 날/ 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기다리다 지쳤음이 오리까/ 높으셨다 노여움이 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라고 노래한 시인 노천명의 ‘임 오시던 날’처럼 기다림이 절박했음일까… 보다 못한 조정에서는 이 정경을 가엾이 여겨 영빈정(英嬪亭)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으나, 그집에는 한번도 들지 않고, 오직 이 초가 정업원에서 80평생을 보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조선조 숙종 24년(1693년)에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 정순왕후도 늦게나마 역사에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영조 47년(1771년) 9월 6일, 옛 정업원 자리에 비와 각(閣)을 세워, 왕이 친히 ‘황조 정덕 십륙년 신사 유월 초사일 후 이백 오십일년 신묘 구월 초육일입, 전후 개 친서(皇祖正德十六年辛巳六月初四日後 二百五十一年辛卯九月初六日立, 前後皆親書)’라는 작은 글자로 새겼다.

비각 액면(額面)에는 ‘전봉후암 어천만년(前奉後岩 於千萬年)’이란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으니, 이를 두고 일그러진 역사 청산이라 하던가.

세월은 가고 역사는 말이 없다. 다만, 정순왕후가 올라,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던 그 동망봉은 날이면 날마다 아침 해돋이의 ‘동망봉’이 되고 있을 뿐.

입력시간 2001/06/20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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