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판'이 깨지고 있다

사활 건 시장쟁탈전, 후발제품 도전에 판도변화 조짐

“애주가들의 입맛이 하루 아침에 바뀌기야 하겠습니까. 후발 주자들이 아무리 돈을 뿌리고 판촉활동을 벌여도 ‘판’을 깨긴 힘들 겁니다.”

국내 약주시장을 사실상 독점해 온 국순당의 마케팅 담당자가 던진 말이다. 올들어 뒤늦게 약주시장에 뛰어든 주류 메이저 진로와 두산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자사 대표 브랜드 ‘백세주’ 의 수성(守城)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하지만 술시장의 메커니즘이란 참으로 묘하다. 국순당 관계자의 확신에 찬 진단과는 달리, ‘백세주’의 10년 철옹성은 시장에 나온 지 한 두 달밖에 안 된 후발제품들의 공격에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나운 호랑이가 하룻강아지한테 쫓기는 격이다. 약주뿐이 아니다. 1인자의 독주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던 소주시장에서도, 선발주자의 텃세가 심하기로 소문난 위스키 부문에서도 올들어 반란의 기운이 거세게 일고 있다. ‘판이 깨지고 있다’는 징후들이 이미 도처에서 감지되고 있다.


‘백세주’ 아성에 ‘군주’ ‘천국’도전장

평온하던 ‘백세주 천하’에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올 3월. 두산이 조선시대 궁중비법으로 만든 13도짜리 전통약주 ‘군주(君酒)’를 출시하면서 부터다.

뒤이어 한 달 만에 진로가 14도짜리 증류주 ‘천국(天菊)’을 내놓으며 시장쟁탈전에 불이 붙었다. ‘천국’은 알코올 함유량 13도 이하를 의미하는 주세법상의 약주는 아니지만 사실상 ‘백세주’의텃밭을 공략하기 위한 제품.

통상 신제품이 시장에 안착하기까지는 2~3년이 필요하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두산과 진로의 약주 제품은 이런 상식을 뒤엎으며 놀랄만한 속도로 ‘백세주’의 텃밭을 잠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진로는 4월 25일 ‘천국’을 내놓은 뒤 서울 및 수도권과 광역시의 식당가를 중심으로 마케팅을 집중한 결과 한 달 만에 9만 상자(12개 들이)의 판매실적을 올렸다고 밝혔다.

약주시장의 95%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백세주’의 한달 평균 판매량이 15만~20만 상자(20개 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실적이다.

진로는 ‘천국’이 판매 호조를 보임에 따라 매출 목표를 당초보다 대폭 상향 조정, 연말까지 시장 점유율을 30%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다. 진로 관계자는 “기존 약주들이 갖고 있는 낡고 오래된 이미지에서 탈피해 맛과 상표명, 디자인, 병모양을 신세대 직장인의 기호에 맞춘 것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두산의 ‘군주’ 역시 신장세가 눈부시다. 3월 중순 발매 이래 두 달 만에 10만200여상자(12개 들이)가 팔려나가며 국순당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두산의 마케팅 담당자는 “외국계 조사기관인 NFO코리아에 의뢰한 결과 블라인드테스트에서 70%, 공개 시음테스트에서 80% 이상 ‘군주’가 ‘백세주’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며 “연내에‘백세주’를 추월해 50%대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오랜 주류제조 경력과 넓은 유통망, 생산라인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직영대리점을 통한 유통방식에 의존하는 중소업체(국순당)를 앞지르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호언했다.


‘산’ 바람에 ‘참이슬’ 흔들

진로의 ‘참이슬’이 평정하고 있는 소주시장에서도 쿠데타의 기운이 감지되고 있다. 선봉에는 두산의 ‘산(山)’이 나섰다.

‘미(米)소주’ 등 잇따른 신제품의 실패로 지난 해 12월만 해도 시장 점유율이 바닥권을 맴돌았던 두산은 올 1월 녹차를 함유한 22도짜리 ‘산’소주를 내놓으며 놀랄만한 속도로 재기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실제로 작년 12월 전국소주시장점유율이 4.4%에 불과했던 두산은 ‘산(山)’소주를 출시한 이래 5월 들어서만 약 41만 상자(30병들이)를 팔아치우며 점유율을 10%대까지 끌어 올렸다.

이로써 금복주 (9.5%), 무학(8.7%), 대선(7.6%), 보해(6.3%) 등 지방업체들을 순식간에 앞지르며 ‘참이슬’을 생산하는 진로(51.2%)에 이어 전국 시장점유율 2위로 뛰어올랐다.

‘산’은 출시 첫 달에는 13만 상자가 팔렸으나 2월19만상자, 3월 32만상자, 4월 36만5,000상자 등 매월 전월 대비 30%씩의 판매율 증가세를 보여왔으며 4월 중에는 국내 소주제품 가운데는 최단기간에 3,000만병 판매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산’의 상승세가 계속되자 진로는 23도짜리였던 기존 ‘참이슬’의 알코올 함량을 ‘산’과 같은 22도로 낮추어 정면대결을 펼치고 있다. 아직 겉으론 느긋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그만큼 ‘산’바람의 위세에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두산 관계자는 “올들어 현재까지1위 업체인 진로는 전국 소주시장점유율이 55.5%에서 51.2%로 떨어져 ‘산’이‘참이슬’의 텃밭을 상당부분 잠식한 것으로 조사됐다”며 “이추이라면 연말까지 진로가 90%이상 독점하고 있는 수도권에서도 20%대의 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복병‘스카치블루’ 등장, 위스키 시장에 전운

‘임페리얼(진로발렌타인스)’과‘윈저(두산씨그램)’, ‘딤플(하이스코트)’이 3분하고 있는 위스키 시장에선 군소업체인 롯데의 ‘스카치 블루’가다크호스로 부상중이다.

롯데 칠성음료가 스코틀랜드의 중소주류업체 번스튜어트로부터 원액을 수입, 1998년부터 생산,판매하기 시작한 ‘스카치 블루’는 올들어 서울의 강남지역 고급 유흥업소를 파고들면서 1ㆍ4분기에만 210억원 대의 판매실적을 거뒀다.

이는 지난 해 전체 매출액 350억원의 60%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 추세라면 연말까지 700억~800억원 대의 판매실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업체측의 예상이다.

또 현재 5%대인 시장점유율도 연말께는 10%대로 신장해 시장구도를 현재의 3파전에서 4파전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업체측은 전망하고 있다.

롯데 관계자는 “제품 출시이후 한동안 선발업체들의 텃세에 밀려 시장진입에 애를 먹었다”면서 “경쟁제품보다 유흥업소 판매가격을 2만~3만원 가량싸게 책정한데다 병 모양을 한국 애주가들한테 인기가 많은 ‘발렌타인’과 흡사하게 한전략이 주효한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수입위스키는 패스포트와 썸씽스페셜 등 중저가 스탠더드급(3년 숙성)이 90% 이상이었고 시장 규모도 미미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주류업체들이 씨그램(두산),얼라이드 도멕(진로), 유나이티드 디스틸러스(하이스코트) 등 세계 3대 위스키 메이저로부터 프리미엄급 스카치 원액을 수입, 치열한 판매경쟁을 벌이면서 시장 규모는 연간 1조원대로 고속 성장해 왔다.

이렇게 형성된 시장구도 속에 ‘스카치 블루’라는 새로운 복병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영원한 맞수 ‘하이트’ ‘OB’

맥주업계에서도 하이트맥주와 OB맥주 간 진검승부가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양사의 경쟁구도가 형성된 것은 1999년말 OB맥주가 진로쿠어스를 인수하면서부터.

시장 2, 3위였던 OB와 ‘카스’맥주의 합병으로 하이트의 독주 체제가 위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OB맥주는 카스맥주를 흡수한 여세를 몰아 올해에는 1996년 이후내줬던 1위 자리를 탈환하겠다는 각오이고, 하이트맥주는 그동안 50% 수준이던 시장 점유율을 아예 60%대로 끌어올려 OB의 추격을 원천 봉쇄하겠다며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OB는 20대 젊은층을 겨냥한 ‘카스’, 남성적 이미지의 ‘OB라거’, 고급 소비자를 위한 ‘카프리’와 ‘버드와이저’등 10여종의 다 브랜드 전략으로 올해 안에 50%대의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에 맞서는 하이트는 당초 역전의 기폭제가 됐던 하이트맥주의 대표 컨셉인 ‘깨끗한 맥주’이미지를 광고 등을 통해 되살려 수성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지난 해 국내 맥주 소비는 1999년(1억4,700만상자)에 비해 11.3% 늘어난 1억6,600만 상자. 업계는 올해도 두자리 수의 신장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1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도 갈수록 치열해질 전망이다.

변형섭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6/21 14:58


변형섭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