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LP여행] 키보이스(上)

국내 록그룹 태동의 발원지

키보이스와 에드훠중 누가 최초의 국내 록그룹일까? 탄생 시기만 놓고 보자면 1960년대 초 태동한 미8군 전속 캄보밴드 코끼리브라더스가 최초의 록그룹이다.

그러나 록그룹 형태로 미8군 무대를 벗어나 일반대중에게 선보인 것은 키보이스와 시기가 거의 비슷하자. 에드훠는 이들보다 늦다. 문제는 음반 발표 여부. 신중현의 에드훠가 64년 발표한 창작앨범이 현재로서는 가장 앞선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코끼리브라더스의 음반은 소문만 무성할 뿐 존재여부가 확인된 적이 없다. 키보이스 역시 64년에 발표했다고 주장하지만 확인할 만한 자료가 불명확한 상태. '가수는 음반으로 이야기해야 한다'는 일반적 상식 때문에 에드훠가 최초의 록그룹으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68년 트윈폴리오보다 몇 달 늦게 대중들 앞에 서고 6년이나 늦은 74년에야 데뷔음반을 발표한 한대수는 ‘한국모던포크의 창시자’로 공식화되어 있다. 창작곡 발표 여부가 정서적으로 이 모든 것을 상위한다고 보면 문제는 명확해 진다.

최고의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1기 키보이스의 음악적 한계는 창작곡 부재였다. 거의 모든 레퍼토리가 번안곡 위주였고 데뷔곡이라 할만한 김영광작사ㆍ곡의 '정든 배는 떠난다'도 당시 일본곡 표절문제로 구설수에 올랐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렇지만 키보이스가 국내그룹들의 최대 발원지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70년대 대부분의 중요 록그룹들은 키보이스로부터 가지에 가지를 치며 ‘개체수’를 늘렸다.

“60년쯤 군에서 탈영했을 때 이미 그룹활동을 했다. 61년 5ㆍ16때 자수하여 군복무를 마친 63년부터는 키보이스를 결성해 본격적인 활동을 했다”고 윤항기 목사는 회고한다.

‘락앤키ROCK&KEY)’라는 그룹명은 미8군 무대에서만 사용했던 또 다른 이름. 유명한 가수였던 송달엽의 부인(작고ㆍ이름 미상)이 자신의 딸인 송영란에게 ‘락(rock)’이란 이름을 붙여 보컬을 맡기고, 윤항기 등 세션맨에게‘키(key)’라는 애칭을 주고 연주를 시켰다.

송달엽의 부인은 매니저 역할을 했다. 송영란의 미국이민 이후 여성보컬은 수차례 교체가 되는데 3인조 코리안키튼스의 멤버였던 김현아가 마지막 여성보컬로 기억되고 있다.

‘락앤키’는 하우스밴드로서 무수한 미8군 가수들의 세션도 맡았다. 봄비로 유명한 박인수는 65년쯤 ‘락앤키’의 객원가수로 데뷔를 하였고 차중락, 쟈니리, 남석훈,서정길, 김선, 점블씨스터즈는 ‘그밤과 같이’(신세기, 가12145, 연도 미상) 음반도 함께 발표했을 정도. 키보이스는 일반대중들 앞에서 공연할 때 사용했던 그룹 이름이다.

솔로독립 이후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사랑의 종말’로 최고인기 가수가 되었던 미남가수 차중락이 리드보컬을 맡았다.

경희대 입학예정이였던 기타 신동 김홍탁이 가세해 새롭게 구성된 오리지널 1기의 라인업은 윤항기(드럼), 차도균(베이스), 김홍탁(리드기타), 옥성빈(키보드), 차중락(보컬)의 5인조.

63년 종로의 유명 음악감상실 ‘드씨네’는 비틀즈가 캐번 클럽에서 그랬듯 일반대중들 앞에서 국내 최초로 록사운드를 연주했던 키보이스의 데뷔공간이었다.

“이종환 이사회를 맡고 있던 드씨네 DJ박스 옆에 임시로 만든 간이무대에서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고 리드기타 김홍탁은 기억한다.

음악감상실의 간이무대를 시작으로 한 이들의 인기는 65년께는 필리핀 그룹 선스팟(Sunspot)과 협연을 하는 등 하늘을 찔렀다. 차중락은 긴 부츠를 신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흉내내는 모창으로 젊은 여성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았고, 사촌형 차도균은 첼로로 베이스를 시도해 신선함을 던져주었다.

윤항기는 맹인가수 레이 찰스처럼 검은 안경을 쓰고 더듬거리며 무대에 올라 맛깔나게 노래를 부르기도했다. 이 당시 멤버들간에는 보이지않는 인기경쟁이 뜨거웠다.

키보이스 초기음반 ‘키보이스 힛트앨범’(오아시스, OL12504)에 수록된 12곡은 모두 번안곡들로 2면 머리곡 ‘바람난 노처녀(WHOLY ROLY)’는 최대 히트곡이다. 곡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 막 산업화의 기지개를 켠 당시 분위기를 반영하듯 밝고 코믹한 도회풍의 가사들이 대부분이었다.

타이틀곡인 ‘이별의 새벽길(TIICKET TO RIDE)’은 비틀즈가 65년 4월에 싱글로 발표한 사실에 미루어 볼 때 65년말에서 66년초쯤 발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수록 창작곡에 대한 음악적 갈증은 더욱 달아올랐다. 60년대 중반쯤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초기음반 ‘정든배는 떠난다’(신세기, 가12125).

오리지널 제목이 이채로운 키보이스의 대표곡 ‘정든 배’는 지금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며 30여년간 불리어지는 정감어린 대중가요.

1기 키보이스의 노래를 듣노라면 트로트 창법을 벗어나지 못한 ‘정든 배는 떠난다’와는 달리 번안곡들은 상당히 세련된 연주와 창법을 들려준다. 각자 개성과 음악 역량이 출중한 멤버들은 새로운 그룹을 창시하거나 솔로 독립을 꿈꾼다. 67년부터 키보이스는 잦은 멤버교체로 엄청난 몸살을 겪으며 핵분열을 시작했다.

입력시간 2001/06/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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