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주' 자리서 물러날까?

태광산업 상장폐지 논란, 소액주주 엄포용 시각도

대주주의 오만인가, 정당한 권리인가.

증권시장에서 최초로 ‘황제주’로 불렸고, 지금도 최고의 ‘자산주’로 통하는 태광산업이 최근 도마 위에 올랐다. 회사가 스스로 상장폐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힌 것이 발단이 됐다.

그 동안 상장폐지는 기업이 망하거나, 상장요건을 채우지 못했을 경우 시장에서 불명예스럽게 쫓겨난다는 뜻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런데 잘 나가는 기업이, 그것도 최고의 우량 회사가 스스로 상장폐지를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웬만한 기업은 상장을 하고 싶어도 요건이 까다로워 하지 못하는 판에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 만하다.

그러나 바로 이 점, 우량기업이라는 사실이 이 회사로 하여금 상장폐지를 검토할 수 있게 한 배경이되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태광산업은 국내 대표적인 화섬업체로, 주력 제품은 스판덱스다. 스판덱스는 수영복 같은 스포츠의류와 속옷등에 사용되는 신축성이 좋은 합성섬유로,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고부가가치 상품이다.

전세계적으로 연간 16만톤이 생산되며, 미국 듀폰사가 세계시장의 50% 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태광산업은 이 분야 국내 선발주자로, 1979년부터 스판덱스를 생산해 왔다.

문제는 이 회사의 자산가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나다는 것. 지난해 말 현재 자본금은 55억7,000만원에 불과한데, 자본잉여금과 이익잉여금을 합한 전체 잉여금이 1조5,073억원으로, 유보율(잉여금을 자본금으로 나눈 비율)이 무려 2만7,426%나 된다.

반면 부채비율은 32.8%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그 동안 벌어 놓은 이익금을 차곡차곡 쌓아 놓아 돈을 빌리기 위해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할 필요가 없는 기업이다. 이 때문에 주가가 한때 80만원에 육박, ‘황제주’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었다.

1997년에는 오너인 이임룡 전 회장이 세상을 떠난 뒤 유족들이 무려 1,060억원의 상속세를 현금으로 한꺼번에 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상속세를 가장 많이 낸 재벌로 기록됐다.

재계서열 29위인 태광산업 대주주 일가가 낸 상속세가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가인 정주영 전 현대 명예회장 일가(300억원 추정)나 최종현전 SK그룹 회장 유족(680억원),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일가(176억원)를 무안하게 하는 수준이었던 셈이다.


최고 우량회사, 주주무시경영 비판

그러나 이처럼 회사가 돈이 많다는 점이 투자자들의 불만을 가져왔다. 회사는 좋은데 투자자에게 돌아오는몫은 별로 없다는 불만이다. 무엇보다 쥐꼬리만한 배당으로 소액주주들의 원성을 샀다.

99년의 경우 1,383억원의 순익을 내고도 주주들에게는 불과 16억원을 배당했으며, 98년에는 1,404억원의 순익에 배당금은 1% 수준인 14억원에 그쳤다.

지난해에도 배당률은 액면가(5,000원)의 35%(주당 1,750원)에 달했으나, 주가가 20만원 수준이었음을 감안하면 실제 배당수익률은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또 8,000억원 이상의 이익금을 사내에 쌓아 놓고도 무상증자를 한번도 하지 않아 ‘주주 무시 경영’을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퇴출위기에 몰린 계열사에는 100억원의 후순위 대출을 해준 데 이어 건물을 장부가보다 비싼 가격에 매입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이 같은 소액주주들의 불만은 올들어 하나씩 폭발하기 시작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의 투명경영이 강조되고, 대주주의 전횡을 막는 제도들이 속속 도입된 결과다.

먼저 소액주주의 입장을 대변해 총대를 맨 것은 외국인 투자자. 지난 3월 정기 주총을 앞두고 태광산업 주식 3%를 갖고 있는 다국적 투자회사 KDMW는 주당 3만원의 현금배당과 100%의 주식배당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서를 회사쪽에 제출했다.

액면가 기준으로 보면 무려 600%의 현금배당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회사측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 소액주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소액주주들의 반발은 이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KDMW는 회사측에 투명경영을 위해 외부 감사 선임을 요구, 오는 14일 임시 주총이 열린다. 회사측의 대응이 주목되지만, 현재로선 우리사주 지분을 포함해 73% 이상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들이 외부 감사 선임을 용납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회사측은 지난 달 23일 증권거래소에 ‘안정적인 경영을 위해 상장폐지 여부를 포함한 다양한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공시한 뒤, 같은 말만 되풀이 하고 있다.

그 동안 증권가에선 태광산업의 폐쇄적인 경영방식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기업설명회(IR)나 애널리스트, 외국인 투자자의 기업 방문에 극도로 거부반응을 나타내 지금은 거의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때문에 증권가에선 “그러려면 차라리 상장폐지를 하든지..”라며 비아냥을 하곤 했다.

그러나 정작 회사 스스로 상장폐지를 검토 중이라고 밝히고 나서자 증권 관계자들은 뜻밖이라는 반응이다.


자금력 충분, 공개매수에도 어려움 없을 듯

우선 상장폐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린다. 상장폐지 검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선 한마디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태도 아니냐”고 직설적으로 비난한다.

교보증권 임송학 투자전략팀장은 “기업은 상장을 통해 주식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도 하고, 대외적으로 공신력을 인정받아 사업상 여러 이점을 누린다”며 “그동안 기업이 성장하는데 상장으로 인한 혜택을 누려 왔으면 상장사로서의 책임과 의무도 지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들어 소액주주들의 힘이 커지면서 요구가 늘어난 것이 상장폐지 검토의 배경인 것 같다”며 “우리 기업들도 이제 달라진 기업환경을 인정하고 주주를 중시하는 경영을 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임동춘 전경련 금융조세팀장은 “상장이든, 상장폐지든 기업이 법 테두리 안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할 사안일 뿐이며, 주주는 지분만큼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회사가 배당을 적게 하거나, 경영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주주는 주식을 시장에서 처분하면 그만”이라며 “외국의 경우 회사의 필요에 따라 상장이든, 폐지든 결정하는 데 대해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태광산업은 정말로 상장폐지를 할까. 이에 대해 증권가에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대우증권 이수혜 애널리스트는 “상장폐지가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지만, 그동안 태광산업의 폐쇄적인 경영행태로 볼 때 상장폐지 검토 공시는 예사롭지 않다”고 말했다.

상장폐지를 할 경우 소액주주들의 지분을 시세보다 높은 값에 공개 매수하는 게 관행인데, 태광산업의 경우 자금여력이 충분해 공개매수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게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이다.

그러나 한편에선 14일 임시 주총을 앞두고 소액주주들을 압박하기 위한 ‘엄포성 대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KDMW의 대리인인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 변호사는 “임시 주총을 한 달 앞두고 주주명부가 폐쇄된 상황에서 상장폐지 검토 공시를 함으로써 소액주주들의 주식 매도를 유도, 투표 참여를 봉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된다”고 말했다.

김상철 경제부 기자

입력시간 2001/07/04 19:23


김상철 경제부 scki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