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65)] 벤토(弁當)

굳이 꽃피는 봄날이나 단풍고운 가을날이 아니더라도 야외에서 도시락으로 즐기는 점심은 색다른 ‘맛’이 있다. 세월을 거슬러 학창시절의 추억에 젖기도 하고 무심히 지나치던 계절의 변화를 잠시 느껴볼 수도 있다.

도심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녹지가 드문 서울과 달리 도쿄(東京)에는 시내 한복판에 크고 작은 공원이 많다. 장마철이나 푹푹 찌는 무더위가 지독한 여름을 빼고는 겨울에도 날만 맑으면 ‘벤토(弁當)’를 들고 공원을 찾는 직장인들이 줄을 잇는다.

일본식 영어로 ‘OL(Office Lady)’이라고 불리는 직장여성들 가운데 더러는 집에서 만들어 가져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사서 먹는다. 전국적 점포망을 갖춘 전문체인점이 여럿이고 ‘호카호카테이(亭)’는 TV 광고를 할 만큼 사업 규모가 크다. ‘따끈따끈’을 뜻하는 ‘호카호카’라는 이름이 절묘하다.

편의점도 각종 면류에서 갈비덮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벤토를 팔고 경양식집 등의 식당도 점심시간이면 벤토 팔기에 열을 올리는 곳이 많다.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오는 길목에 소형트럭을 세우거나 임시 진열대를 만들어 도시락을 파는 영세업자들까지 포함하면 여간 경쟁이 치열한 산업이 아니다.

그래도 값이 조금이라도 싸거나 맛있는 것으로 알려진 가게는 점심시간마다 길게 줄이 늘어선다. 벤토에 대한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에는 싸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2,000엔을 예사로 넘는 고급 음식점의 호화 벤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종류에 따라 400~1,000엔 정도이고 같은 종류라면 식당에서 주문해 먹는 것보다 30% 정도는 싸다. 그러니 65엔짜리 햄버거나 280엔짜리 쇠고기덮밥등의 등장은 벤토산업에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 여파는 역이나 열차에서 파는 벤토인 ‘에키벤(驛弁)’에도 미치고 있다. 에키벤은 열차 여행의 묘미로 꼽혀왔지만 햄버거나 샌드위치 등 간이식품에 조금씩 자리를 내주고 있다. JR 히가시니혼(東日本)이 7월 중순부터 미국산 쌀을 쓴 에키벤 발매를 계획하고 있는 것도 경쟁력을 되찾으려는 몸부림이다.

60년대까지 ‘벤토’라는 일본어를 흔히 쓰면서 우리가 품었던 이미지도 ‘싸다’와 통하는 ‘가난’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도시락이라는 우리말이 완전히 정착했지만 책과 함께 보자기로 싸서 등에 비스듬하게 매고 달리던 그때의 양은 도시락은 어쩐지 ‘벤토’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릴 듯하다.

방과후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내 등뒤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내던 ‘벤토’를 보온기능까지 갖추고 내용물도 비교가 안되는 요즘의 도시락과 같은 말로 부르기가 어딘가 어색하다.

원래 일본어의 ‘벤토’라는 말은 현재의 이런 이미지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한자 표기는 중국 남송시대의 속어로‘편리, 적절’을 뜻했던 ‘편당(便當)’이 들어와 변한 것이다.

발음이 같은 편도(便道), 변도(弁道)로도 표기됐고 주로 '후벤'(不便)의 반대말로 쓰였다. 한편으로 1603년에 나온 ‘닛포지쇼(日葡辭書)’가 ‘벤토’의 고형인 ‘벤타우’에 대해 ①풍부, 충분, 부유 ②벤토바코(弁當箱)라는 두가지 뜻으로 풀이했다.

이중 ②의 뜻만 남아 ‘그런 그릇에 담은 음식물’로 의미를 확장한 결과가 현재의 ‘벤토’인 셈이다. 우리말의 도시락과 정확히 대응하는 말이다.

그러나 1791년에 간행된 ‘오키나구사(翁草)’가 ‘벤토바코’에 대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시대에 만들어졌고, 작은 크기에 여러 가지 도구를 담을 수 있다는 말에 거짓말이라고 믿지않는 사람도 있었다’고 적었다.

이로 보아 당시 벤토바코는 요즘의 만능 도구함같은 것이었을 뿐 음식물 전용은 아니었다. ‘벤토’라는 한자표기가 일본 고유어 ‘와리아테(割當)’와 대응한다는 점에서도 칸이 나눠진 도구함을 떠올릴수 있다.

한편 일본 고유어로 속을 여럿으로 나눈 그릇, 또는 그런 그릇에 담은 음식물을 뜻하는 ‘와리고(破子, 破籠)’라는 말이 있었으나 한자어인‘벤토’에 밀려나 설자리를 잃었다.

일본인들의 식생활이 다양해지면서 벤토의 종류도 끝없이 늘어나고 있다. 가부키(歌舞伎)나 연극의 막간인 ‘마쿠노우치(幕の內)’에 먹는다는 데서 이름이 나온 ‘마쿠노우치벤토’는 육류와 생선, 야채 반찬이 골고루 들어 있는 전통표준형이다. 우리 입맛에도 무난하지만 날로 이런종합형 벤토보다는 단순형 벤토쪽으로 인기가 기울고 있다.

입력시간 2001/07/05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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