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7)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단장 유향숙 박사(上)

"한국인 위암·간암 유전자 연구"

그녀에겐 어머니 같은 넉넉함이 느껴진다. 따뜻한 웃음속에 강인한 힘이 숨어있고, 편안함을 안겨주는 여유와 너그러움이 사람을 잡아끄는, 넓은 품이 있다.

그래서 인간유전체(게놈) 연구의 대모(代母)로 일컬어지는 유향숙박사. 공식 직함은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 단장이다.

그러나 다소 딱딱하게 들리는 ‘단장님’의 권위보다는 넉넉한 품으로, 조금 부족한 듯한 연구원들을 감싸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걸 스타일이다.

‘유향숙을 알면 우리 나라 게놈 연구의 앞날이 보인다’는 세간의 평가에서 보듯 개인적으로는 한국인 유전체기능연구에서 맨 앞자리에 서 있기도 하다.

유 박사가 하루 24시간을 보내는 인간유전체기능연구사업단은 우리 나라 과학기술의 요람인 대덕단지의 한 켠에 자리잡은 SK연구소안에 있다. 작년 8월 역시 대덕단지에 있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10년 생활을 청산하고 그쪽에 연구실을 임대해 옮겨갔다.

한국인 게놈연구에 필요한 숱한 첨단장비를 들여놓기엔 연구원의 공간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게놈연구의 토대 마련"

“우리 사업단의 게놈연구는 정부(과학기술부)가 추진하는 21세기 프론티어연구 개발사업중 시범사업으로 선정됐습니다.

한국형 게놈프로젝트인데, 국책사업이다 보니까 사명감도 느끼고, 부담도 적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나라 게놈 연구의 기초를 다지고, 활성화를 위한 토대도 마련해야지요. 또 최고수준의 기술도 개발해야 하고.”

워낙 첨단을 달리는 생명공학 분야이다 보니 유 박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듣지 않으면 말의 흐름을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특히 시퀜싱(sequenceing, DNA의 염기 분석 용어)과 같은 전문용어가 간간이 튀어나와 성큼성큼 앞서가는 말의 속뜻을 헤아리기도 쉽지 않다. 그럴 때일수록 자상한 설명으로 속도를 늦추는 그녀가 고맙다.

‘백 마디 말보다 한번 보는’ 게 낫듯이 낯설기만 한 실험장비도 바로 코앞에 두고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한결 쉽다.

그 많은 장비와 컴퓨터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눈에도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것들의 의미를 기계와 컴퓨터속에서 찾아내는 연구원들의 일이 따분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그게 우리 인간 생명의 신비를 캐는 작업이고, 주변 환경이 웬만큼 갖춰져 있으니 다행이다.

실험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초여름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다. 파란 하늘에 어울리는 녹색 잔디, 이름모를 꽃들과 수목들. 한적한 고급 골프장에서나 봄직한 풍경이다. 연구소의 뜨거운 열기와 스트레스를 식혀줄 만큼 잘 가꿔진 자연이 바로 창밖에 있다.

“연구환경엔 만족합니다. 미국의 어떤 연구소 못지 않게 주변이 잘 가꿔져 있고, 아직 모든 장비를 다 설치하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장비는 이미 가동중이지요.이제 연구성과만 내면 됩니다.”

생명공학연구원의 유전체연구센터에 속했던 유 박사는 1999년 정부가 추진한 21세기 프론티어 연구프로젝트에서 유전체기능연구분야를 따내 지금의 새 살림을 차렸다.

그래서 식구들은 대부분 과거 10여년간 유전체 연구센터에서 함께 일했던 연구원들 이다. 현재 식구는 모두 35명. 6개월여에 걸쳐 모두 30억원을 들여 값비싼 염기자동분석기를 비롯해 DNA칩 분석기, 컴퓨터 등 게놈연구에 필요한 장비를 사들였다.

염기자동분석기를 300여대를 갖고 인간게놈지도를 완성한 미국의 셀레라사에는 비할 바가 아직 아니지만 국내에서는 최고의 시설을 갖췄다고 자신한다.

“셀레라사를 중심으로 한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의해 유전자의 95% 정도는 그 구조(염기서열)가 밝혀졌어요. 이제는 어떤 유전자가 인체에서 어떤역할을 담당하는지 밝혀내야 할 때지요.

유전자 구조 분석에는 값비싼 기계가 많이 필요하지만, 유전자 기능 연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중요하지요. 우리 사업단 정도면 유전병 관련 유전자를 찾아내고 기능을 연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나라엔 위암과 간암이 유독 많기 때문에 이들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사실 유 박사팀은 이미 첫 성과를 얻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당초 예상보다는 상당히 빠른 편. 지난 5월 위암을 유발하는 원인으로 알려진 헬리코박터 파이로리(Helicobacter pylori)균의 유전체 염기서열을 완전히 해독한 것이다.

이젠 유명 우유제품의 CF에도 등장하는 헬리코박터균의 보균률은 한국인의 경우 90% 상이지만, 미국인은 5~10%에 불과하다.

문제는 한국인과 미국인의 헬리코박터균이 다르다는 것이다. 유 박사팀의 분석에 의하면 한국인의 헬리코박터 유전체는 모두 159만1,297개의 염기 쌍으로 구성됐고, 유전정보를 갖고 있는 유전자도1,454개였다.

미국과 영국에서 보고된 헬리코박터균에 비해 염기쌍수는 4%정도, 유전자수는 각각 8~3%정도 각각 적은 것이다.

“한국인 헬리코박터균의 구조가 미국인과 다른 것은 우리 나라의 높은 위암 발병율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구조를 일단 밝혀냈으니까 그것을 외국인들과 비교해서 왜 다른지, 그 다른 것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를 해야지요.

다행히 경상대 의대의 이광호 교수가 헬리코박터균에 대해서는 연구를 해둔 게 많아 도움을 많이 받았고, 앞으로도 유용하게 활용될 것입니다.”


"한국인 유전자에 맞는 치료제 개발해야"

이광호 교수는 1988년 헬리코박터균이 위암의 원인균 중 한가지임을 처음 규명한 바 있다. 유 박사가 굳이 헬리코박터균의 구조를 밝혀내고, 외국인들과 다른 점을 찾아내려는 것은 인종과 민족마다 유전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면 체질이 다르다는 것과 같다. “한국인과 미국인의 유전자가 서로 다른데, 미국인 유전자에 맞춰 개발된 시약이나 치료제를 쓰면 그만큼 오진이나 부작용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는 게 유 박사의 설명이다.

유 박사팀의 유전체 연구 수준은 이미 미국으로 부터 인정을 받고 있는 상태다.

미 국립보건원(NIH) 산하 국립암연구소(NHGRI)의 로버트 스트라우스버그 소장이 지난해 브라질의 게놈연구소와 함께 한-미-브라질 3국이 공동으로 암연구를 하자고 제의한 것이 대표적이 예다.

공동연구를 하게 된 계기는 물론 국가별로 암이 많이 발생하는 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미국엔 대장암과 유방암이 많고, 브라질은 뇌암과 후두암, 우리 나라엔 위암과 간암이 주류를 이뤄 공동연구를 하면 암 발병이 유전자와 환경 등 어떤 요인에 의해 국가별로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알게 된다.

미국의 암연구소가 그 존재를 인정한 유 박사는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히 과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65년께로 기억하는데, 외부에서 온 한 강사가 앞으로 잘 살려면 과학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그 시절, 그녀가 들었던 과학입국의 당위성은 진로에 큰 영향을 미쳤고, 끝내 ‘과학중의 과학’이라는 생명공학분야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굳히는 이론적 기준이되고 말았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유 박사의 어릴 때 꿈은 성악가였다고 귀띔한다. 넉넉한 체구와 성량감 있어 보이는 목소리는 그녀가 성악의 길로 나섰어도 성공했으리라는 느낌이다. 화학(서울대)을 전공한 유 박사는 대학원에서는 생명과학의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멋모르고 쥐에다 암세포를 주입한 뒤 추출한 물질로 유기합성 치료제를 만들어 보았어요. 그 약을 투입했더니 쥐의 암세포가 더 자라지 않는 걸보고는 신기했고, 처음으로 항암제도 가능하겠다는 확신을 가졌어요. 과학이란 게 바로 이런 것이고, 그래서 빠져드는 거지요.”

유 박사 또래의 생명공학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녀도 70년대 초 운명적으로 유전공학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화학 물질 연구에 재미를 들여갈 즈음 유전자 조작이란 새 분야가 들불처럼 번졌기 때문이다.

또 분자생물학(DNA분석)이란 새로운 용어가 그녀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다. 도전하고픈 욕망은 밑바닥에서부터 치밀어 올랐으나 섣불리 유전공학쪽으로 방향을 틀지는 못했다.

기존의 연구도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었고, 또 새 학문을 배우려면 미국과 같은 선진국으로 가야하는데, 현실이 받쳐주지 못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유 박사는 1975년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타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바다건너 처음 간 곳은 캘리포니아대학 산타바버라 캠퍼스. 유 박사에겐 제2의 고향으로 느껴지는 그곳에서 존 카본 교수를 만나 유전자 조작 등 유전학 공부를 시작했다.

과제는 유전자 발현기전에 관한 것이었다. 유전자가 어느 때 인체의 각종 기능을 통제하는 단백질을 만들어 내고, 어느 때 만들어내지 않는지를 밝히는 작업이었다. <계속>

이진희 사회부 차장

입력시간 2001/07/0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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