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동대문구 영휘원 숭인원

무덤에는 더러 ‘원(園)’이라는 것이있다. 왕이나 왕비가 승하하여 묻히면, ‘능(陵)’이라 하고 왕자나 후궁의 무덤을 ‘원(園)’이라 하였다.

그러나 왕이나 왕비에서 폐위 되었을 경우는 아예 일반 국민과 같이 ‘묘(墓)’라 불렀다.

동대문구 지역에는 영휘원이니 숭인원, 휘경원 같은 것이 있었다.

영휘원(永徽園)은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嚴氏:1854~1911)의 무덤으로 옛 홍릉(청량리동) 바리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순헌귀비 엄씨는 조선조 철종5년 엄진삼(嚴鎭三)의 맏딸로 태어나 8세에 입궐,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위상궁(侍衛尙宮)이 되었다.

명성황후는 그 당시 철저히 배일(排日)하며 친러정책을 썼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몰래 자객을 경복궁에 잠입시켜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를 ‘을미사변’이라 한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오늘날 덕수궁 근처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니 이를 ‘아관파천’ 이라 한다. 지금도 러시아 공사관터와 덕수궁의 정관헌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당시의 급박했던 나라 안팎의 정세를 대변해주고 있다.

아관파천 때 고종을 모셨던 분이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던 엄씨. 엄씨는 결국 순헌귀비로 명성황후 뒤를 이어니, 영왕(英王:李垠)를 낳게 된다.

엄귀비는 고종을 모시면서 신교육, 신문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양정의숙(1905년:양정고등학교)과진명여고(1906년)를 잇따라 설립하고 신명여학교(현 숙명여고) 설립에도 거액을 기부하는 등 근대교육의 도입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11년 7월 20일, 덕수궁에서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같은해 8월2일 청량리에 묻히니 영휘원(永徽園: 사적 제361호)이다.

또 엄귀비가 잠들고 있는 영휘원 경내에는 엄씨의 손자 이진(李晉:1921~22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조선조말, 대한제국의 급박한 국제정세 속에서 헤이그 밀사 사건이 있자 일제는 재발을 방지한다는 구실로 황태자(李垠)를 일본으로 볼모로 데려간다.(당시 고종황제의 뒤를 이은 순종황제는 후손이 없어 이은을 황태자로 삼으니, 의민황태자(영왕)였다.

영왕은 결국 일본에서 일황실의 마사꼬(方子)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영왕은 그때 이미 결혼을 하기로 한 민가방 여사가 조국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일제는 대한제국 황실의 절손을 목적으로 일황실안에서 애기를 못낳는 불임 여자를 골라 결혼시킨 것이 바로 마사꼬 여사.

그러나 그사이에서 황손이 태어났으니 바로 진(晉)이었다. (마사꼬를 불임의 여자로 추천했던 일황실 전의는 활복 자살하고 만다)

1922년 4월, 영왕은 진의 백부인 순종황제에게 결혼 보고 겸 모국 나들이로 진과 함께 일시 귀국, 같은해 5월 8일 일본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출국 하루전인 5월 7일 새볔, 진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부모나 형보다 일찍 죽으면 효도가 아니어서 장례를 치를 수 없었던 것이 우리의 관습이었다. 그러나 순종황제는 억울하게 죽은 어린 진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특별히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고, 조모(엄귀비)곁에 묻히도록 하니 숭인원이다.

살아생전에 근대화교육에 열정을 쏟았던 엄귀비의 넋일까…, 영휘원 주변에는 과학기술원을 비롯 대학교, 각종 연구원, 벤처벨리가 ‘영휘원(永徽園)’의 글 뜻처럼 길게 아름답게 에워싸 원을 그리고 있다.

입력시간 2001/07/10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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