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식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 해법

'단기 적자, 장기 흑자'로 간다

언론사 세무조사로 야기된 소용돌이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한나라당에선 지금까지는 ‘평균이상’의 점수를 주는 분위기.

여당의 파상공세에 맞서 비교적 무리없이 야당의 대오를 잘 이끌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총재의 ‘나를 따르라’는 외침에 조금씩 불만의 소리가 새어 나오고 검찰의 언론사수사가 강도를 더해 가면서 이 총재가 넘어야 할 벽은 그만큼 높아졌다.

이회창 총재가 7월4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언론말살 규탄대회에 참석, 사회자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최종욱/사진부기자>


“여권 페이스에 말리면 낭패”

풍경1. 국세청의 언론사 세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인 어느날 한나라당의 한 중진급 의원은 이회창 총재에게 예기치 못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이 총재의 측근그룹으로 분류되지만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 갑작스런 총재의 호출이 심상치 않았다.

“000의원, 요즘 언론사 세무조사를 어떻게 보는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보는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이 총재의 목소리는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 의원은 즉시 대답했다.

“총재님, 저쪽에선 ‘all or nothing’(전부얻거나 전부 잃는)식의 게임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총재님도 똑 같은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절대 덥석 물어서는 안됩니다. 여권에서 강하게 나올수록 우리는 신중하게 대응을 해야 합니다. 이곳 저곳을 잘 짚어서 지뢰가 없는 지 확인한 뒤 조심 조심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역공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이 총재는 “유념하겠다”는 간단한 응대가 들린 뒤 이내 통화가 끊어졌다.

이 의원의 설명은 이랬다.“사안이 중대할수록 총재와 당이 방향을 신중하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번 언론사 세무조사 공방은 보기에 따라 선악의 2분법이 잘 적용되지않는 모호한 성격이 있다.

자칫 잘못해 여권의 페이스에 휘말려 우리의 대응이 도를 넘어설 경우 낭패를 볼 우려가 있다”는 취지였다.


“특단의 결심 필요할 때”

풍경2. 6일 한나라당의 7월 임시국회 소집 후 열린 원내대책회의. 당내에서 강경파로 분류되는 최병렬 부총재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국회 소집은 원내총무에게 재량권을 줬지만 언론사태에 대한 당의 접근이 옳은가. 좀 미약한 것 아닌가. 옛날 야당의 김대중 김영삼 총재일 때 이런 문제가 나왔다면 정치판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대한민국을 전쟁 비슷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데는 정권의 특별한 목적이 있다.

특정언론을 무력화시키면서 사정 등으로 야당의 예봉을 꺾고 김정일 답방을 이뤄내 국면전환을 하려는 것 아닌가. 사태를 심각하게 보고 향후 대응도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 문제는 지금부터 이다. 검찰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여론을 오도할 자료를 항상 흘려내기 때문에 ‘특단의 결심’이 필요하다”

최 부총재가 말한 특단의 결심이 국민들을 상대로 한 대규모 규탄대회를 비롯한 장외투쟁임은 쉽게 짐작이 되는 대목. 국회 농성, 지도부 단식 등 야당이 동원할 수 있는 강경책들이 모두 포함된다. 이날 회의에는 총재가 불참했지만 최 부총재의 어법은 총재를 겨냥하고 있었다.


“편파적 사정은 법이 아니다”

풍경3.

4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중앙당사 10층 대회의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몹시 상기된 표정이었다.

이 날은 난타전 양상으로 전개되던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의 와중에 야당에게는 꽤 의미있는 날이었다. 옥내 집회의 성격을 띤 것이었고 당원들이 대상이었지만 원외투쟁에 시동을 건 것이었다.

원내외 위원장들과 당직자 500여명이 꽉 들어찬 이 행사는 이른바 ‘김대중 정권 언론탄압 규탄대회’.

이 총재는“우리는 정말 어려운 국난의 시점에 서 있다. 과연 이 나라에 언론자유가 살아 남느냐, 죽느냐는 시점에 와있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특히 “불공정하고 편파적인 사정은 이미 그것은 정의가 아니고 법이 아니다. 그것은 불법이다”라며 ‘법의 정의’를 강조, 자신의 법조인 이미지를 오버랩 시켰다. 이 총재는 “언론자유 수호의 목표를 관철하고 대항하는 데는 방법에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당론을 훼손하는 것이 되어선 안된다. 우리 스스로 모두가 한데 뭉쳐야 한다.”

당원들의 환호에 고무된듯 이 총재는 당의 단합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이회창식 정치술은 무엇인가

이날 이 총재의 연설에선 현정국에서 ‘이회창식 정치술’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포인트가 몇가지 있었다.

우선 한나라당의 대여투쟁방법론은 외부적으로 상당히 강성으로 비쳐지지만 한 꺼풀을 들춰보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현정국을 이끌어 가는 야당총재의 고민이 그대로 농축돼있다. 언론사 세무조사 문제에 대해 야당의 강성 기조는 지금껏 ‘언어의 공격’에 뒷받침된 것이었다.

최 부총재 등 강경파들은 ‘말’ 이 아닌 ‘실력행사’, 즉 보다 선명한 대여 투쟁을 주문하며 이 총재를 압박하고 있는 것.

반면 온건 그룹에선 “이번 싸움은 장기전인 만큼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대여투쟁의 속도조절을 외치고 있다. 이 총재는 아직은 후자쪽에 서있다. “강력 투쟁을 할 수도 있지만 아직은 원내에서 합리적으로 말을 하고 가능한 논리적으로 일을 처리하자(권철현 대변인)”는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할 대목은 야당은 여권의 강경 드라이브에 ‘김정일 답방 사전 정지용’주장과 ‘언론자유수호’투쟁이라는 두 축의 논리로 대여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 총재는‘언론자유수호’라는 대의명분만을 내세우고 있는 점이다.

이 총재의 연설 어느 대목에도 ‘김정일’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이 총재가 지금껏 ‘김정일 답방 정지용’주장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은 여당의 색깔론 공세에 “색깔론도 아니고 비약도 아니다”라고 방어한 것이 고작이다.

당의 한 관계자는 “언론자유 수호는 도시 중산층 중심의 족벌 언론에 대한 불만을 발을 묶어두는 역할을 하고, 답방 정지용 주장은 영남 보수층의 막연한 불만이 분출할 수있는 계기를 만드는 양날의 칼”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그러나 이 총재는 강경 드라이브를 걸지는 않고 있다. 이념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김정일답방 정지용’ 주장에 대해 이 총재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의도된 역할 분담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최 부총재를 비롯한 영남 지역 강경파들의 목소리에 대해 ‘묵인 방조’는 하지만 ‘고무 선동’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이부영 부총재를 필두로 한 당내 개혁성향 의원들의 요구에도 이 총재는 강경파와 유사한 어법으로 상대하고 있다. 당의 단합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도 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당내 소장파들의 모임인 미래연대 소속 의원들이 면담을 요청, “ ‘당이 사정기관의 호남인맥들이 총동원 됐다’면서 지역감정 자극 공세를 한 것은 잘못”이라고 의견을 전하자 이 총재는 “사후에 보고받았는데 문제가 있었다”고 즉석에서 동의를 표하고 소장그룹을 다독거렸다.

물론 그 뒤에는“지금은 위기상황이니 이 문제 말고는 당의 의견을 따라달라”는 주문이 따랐다.


이 총재는 과연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나.

총재실 주변에선 언론사세무조사 정국의 대차대조표를 ‘단기 적자, 장기 흑자’의 구도로 보고있는 것 같다. 한 측근인사는 “전체적인 지지율은 부분적으로 감소할 수 있다.

그러나 대선이 본격화하면 현 여권 주자들도 언론사와 타협을 시도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세무조사 문제는 비기는 쪽으로 갈 것”이라며 “그 시점에 가면 세무조사에 대한 이 총재의 비판적 입장이 지지분위기로 반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전투에서는 질 수 있지만 전쟁에선 이길 것”이라는 예측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이기는 싸움의 구도로 가기에는 난관도 적지않다. 여권의 ‘언론개혁’명분에 공감하는 계층이 엄존하고 검찰 수사 결과도 야당에 별로 좋은 구도로 그려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당내 보수파들 사이에선 언론사 정국을 이총재에 대한 ‘신뢰’여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야당의 보수파들의 강경 움직임이 거세지고 반대로 개혁파들의 대립각도 날카로와 질 전망. 이 총재는 힘겹게 대여전선 진두지휘하면서 보수-온건파의 사이에서 숨가쁜 줄다리기를 해야 할 상황을 대비해야 할 지 모른다.

이에 대해 총재 측근의 한 의원은 이렇게 정의했다. “이 총재의 기본 노선은 합리적인 온건 보수이다. 이 총재는 ‘보수ㆍ 강경’의 이미지를 얻는 것을 달가와 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지지기반인 보수층에게 실망감을 주는 선택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장외투쟁 등의 문제는 기회를 볼 것이다. 어차피 언론사 세무조사 정국은 검찰수사 결과 발표라는 또 한차례의 고비가 기다리고 있다.

강경파들이 요구하는 극단적인 방법들은 언론사주 구속 등 또 한차례 밀물이 쳐 올 때 여론의 추이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이 총재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최대변수는 민심이 될 것이다.”

이회창 총재가 7월4일 여의도 중앙당사에서열린 언론말살 규탄대회에 참석, 사회자에게 뭔가를 지시하고 있다. <최종욱/ 사진부 기자>

이태희 정치부 기자

입력시간 2001/07/11 19:33


이태희 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