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66)] 야스쿠니진자(靖國神社)①

도쿄(東京) 한복판인 치요다(千代田)구 황궁 북쪽에 구단(九段)이라는 곳이 있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전260여년간 일본을 통치한 도쿠가와(德川) 가문이 경사지에 9층의 석축을 쌓아 관용 저택을 지었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석축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은 천황이 머물렀던 교토(京都) 대신 에도를 도읍지로, 에도성을 황궁으로 정한 것은 260여년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권이 바뀌었고 천황이 권좌에 복귀했음을 알리는 많은 상징 만들기가 필요했다.

메이지 유신 직후인 1869년에 이뤄진 구단 지역의 정비도 그 일환이었다. 석축 옆의 비탈길을 넓히고 언덕위에 '도쿄 쇼콘샤'(招魂社)라는 신사를 세웠다. 도쿠가와 가문의 수호신사였던 아카사카(赤坂)의 '히에진자'(日枝神社)를 의식, 더 높은 곳에더 크게 세웠다.

바쿠후(幕府)군과의 싸움에서 숨진 영혼을 '호국의 신'으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워진 쇼콘샤 가운데 황실이 납폐(納幣)하는 도쿄 쇼콘샤는 으뜸 신사였다.

천황을 위해 숨진 영혼을 기리려는 쇼콘샤의 설립은 이후 군국주의의 종교적 기둥이 된 국가신도가 당시에 이미 싹텄음을보여 준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정한론(征韓論)의 주창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우두머리로, 무사들이 메이지정부에 칼을 들이댔던 세이난(西南)전쟁이 진압된 2년후인 1879년 도쿄 쇼콘샤는 그 이름이 '야스쿠니진자'(靖國神社)로 바뀌었다.

'나라를 편안하게한다'는 이름처럼 호국신사, 엄밀하게는 황국(皇國)신사로서의 성격이 더욱 강해졌다.

이후 2차 대전에 이르기까지 전몰자들이 합사(合祀)됐지만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는 것'이 조건이었다.사이고 다카모리 등 반란자는 물론이고 도망병이나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명 전몰자도 대상에서 제외됐다.

군국주의와 국가신도가 절정을 이루었던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젊은이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최후의 약속을 남기고 전쟁터로 향했다. 민족 독립의 분명한 전망을 갖지 못했던 수많은 식민지 청년들도 비슷했다.

최고의 신사에, 신도의 교의에 따라 '가미'(神)로 모셔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내달린 청년들의 마지막 위안이었다. 그만큼 야스쿠니신사는 광란의 이데올로기가 빚은 '천황을 위한 전쟁'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후 일본을 통치한 연합군총사령부(GHQ)는 야스쿠니신사의 이런 성격을 간과하지 않았다. 국가와의 관련을 완전히 끊고 단순한 종교 시설로 남느냐, 종교색을 버린 순수한 전몰자 추도 시설로 남느냐는 양자택일을 제시했다.

야스쿠니신사는 '종교 시설'을 택했으나 GHQ는 다른 전몰자 추도 시설을 세워 야스쿠니신사의 특수 기능을 박탈하는 등의 철저한 과거 청산은 이루지 못했다.

국가신도가 폐지되고 47년 새로운 헌법하에서 정교분리가 규정된 후에도 야스쿠니신사는 단순 종교시설이면서도 독점적 전몰자 추도 시설로 남는 모순된 상황이 이어졌다.

철저하지 못했던 과거청산의 여파는 이내 나타났다. 60년대 후반부터 자민당은 야스쿠니신사를 국가 관리하에 두자는법안을 잇달아 제출했다.

여론의 반발에 부딪쳐 번번이 실패했지만 야스쿠니신사는 특별하다는 일본인들의 잠재 의식을 일깨우는 효과는 충분했다.

더욱이 78년 10월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합사되면서 야스쿠니신사의 속성은더욱 굳어졌다. 이듬해 4월 불붙은 논쟁에서 일본 보수세력은 "A급 전범은 일본이 주권을 상실한 상태에서 연합국의 일방적 재단에 의한규정일 뿐 일본 국내법상의 범죄자가 아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이 일본 원호법과 은급법 적용 대상에 포함된 것을 근거로 들었다.

한편으로 전범의 합사는 야스쿠니신사의 뜻이 아니라 후생성이 중심이 된 민관 합동기구의 결정에 의한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2차 대전 당시 육군과 해군이 야스쿠니신사 관리를 맡아 합사해야 할 전몰자 명단을 알려 주었으나 패전후에는 후생성이 이를 맡았다. 후생성이 B, C급 전범에 대해 61년부터 '합사 명단'을 통보했고 A급 전범에 대해서도 66년 2월 명부를 통보한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A급 전범을 국제정세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은 침략전쟁을 '아시아 해방과 일본의 자위를 위한 전쟁'으로 미화하는 인식과 그대로 통한다. 또한 그런 인식에 바탕한 A급 전범 합사가 일본 정부의 뜻이라는 점이 야스쿠니신사 문제의 본질이다. (계속)

입력시간 2001/07/1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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