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등산 지도책 펴낸 약사 손치석

"나보고 '현대판 김정호' 랍디다"

지면 이길 때까지! 바둑을 뒀다하면 반나절이 됐든 종일이 됐든 이길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테니스 시합은 특히 고역이었다.

젊은 날 숱하게 대회를 휩쓴 '왕년의 선수'라도 점점 젊은이들의 위협적인 체력엔 당할 수 없었다. 게임에 지고 돌아 선날은 종일 기분이 내리막이었다. 집요한 승부욕에 스스로 질려버렸다. 승부가 필요없는 곳에 가기로 했다. 그게 산이었다. 20년이나 산을 오르내렸다. 약사 손치석(63)씨의 등산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내기를 걸었다. 평소보다 게임기간이 좀 더 길었을 뿐이다. 문외한에 가까운 그가 직접 지도를 만들었다. 정말 모진 싸움이었다. 상금이나 트로피 하나 걸리지 않은 이 시합에 3년6개월을 던졌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일전이 끝난 지금은 기쁘기보다 허탈한 기분까지 갖고 있다.

"그 어려운 일을 어떻게 끝마칠 수 있었는지, 정말 제 스스로 대견스럽습니다. 뭣보다 남의 것 하나 '훔치지'않고 모두 제 힘으로 해냈댜는게 가장 자랑스럽습니다."

그가 만든 것은 '거기에 산이 있었네(1, 2)'라는 산행 안내서다. 1997년부터 최근까지 포함, 철원, 양평, 여주 등 서울과 경기일원의 163개 산의 등산로 지도는 물론 인근 유적지와 숙박업소, 음식점, 교통편까지 샅샅이 훑었다.

본인이 '이만한 책이 없을 것'이라 장담할 만큼 철저하게 확인하고 속을 채운 책이다. 자상하기가 이를데 없다.

'김 아무개씨댁에서 왼쪽, 50m쯤 가서 임아무개씨댁에서 오른쪽으로.! 첫권이 선보이던 지난해엔 교보문고에서 발표한 취미실용서부문 '올해의 책' 으로도 선정됐다.


낡은 등산안내서로 곤욕 "차라리 내가 만들자"

"워낙 제가 기존 안내서들 때문에 혼이 났거든요. 처음 등산을 다닐 때 그 책들만 믿고 산을 찾아다녔는데 너무 오래되고 생략된 부분이 많아 번번이 허탕을 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책에는 분명히 표시가 돼 있는데 막상 가보면 없다든지 아니면 골프장이나 지뢰지대로 변해있거나, 너무 설명이 막연해 몇 시간씩 산길을 헤매다가 지쳐서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그게 너무 화가 나 제 책엔 더 자세히 일러주느라 글 분량이 늘었습니다."

취미삼아 찾은 산에서 약만 바짝 올랐다. 대부분 10년전에 제작된 낡은 안내서는 수시로 등산객들을 배신했다. 자신처럼 헛고생으로 투덜내는 경험자들이 주위에도 흔했다. 그럴때마다 별렀다. '차라리 내 손으로 만들고 만다!'

불타는 의욕으로 호엄장담했지만, 닥치고보니 막막했다. 아마추어 중에서도 아마추어. 일반 지도조차 어디서 사는지를 몰라 물어물어 구했다. 지도 보는 법부터 다시 공부했고, 등산개념도를 그리기위해 형광등 조명위로 기존 지도와 백지를 겹쳐놓은 다음 베껴그리는 연습도 수차례 거쳤다.

축적 5만분의 1지도와 2,500분의 1지도, 그리고 온도와 습도 등 일기상황을 알려주는 특수시계와 나침반, 고도계, 카메라 등 별도 장비도 마련했다. 본격적으로 등산로 확인에 들어가면서부터 가장 문제는 생업이었다.

곧이곧대로 주말산행만 다니면 15이 걸려도 못 다 끝낼 작업이었다. 할 수 없이 부인에게 약국을 맡겨둔 채 수시로 자리를 비워야했다. 많을땐 일주일에 나흘씩 출타중, 아침에 나가면 캄캄해진 뒤에야 돌아오곤 했다.

사진까지 직접 찍다보니 새벽 댓바람부터 뛰쳐나간 적도 부지기수다. 비나 눈이 내린 다음날이면 특히 사진이 예쁘게 찍힌다는 것도 이때 터득했다.

답사대마다 쓴 교통비, 식대 등 잡비랑 약국을 비우느라 손해 본 것까지 합치면 자료조사하는데만 약 7,000만원은 썼을 겁니다. 약국을 비우면서도 찾아올 환자들에게 죄송해 산행중에도 늘 휴대폰을 열어놓고 손님이 올때마다 집사람이 전화로 알려주면 간단한 것은 전화로 직접 지시를 했습니다.

낮에 부탁받은 약은 저녁에 지었다가 내주기도 하고, 욕을 안 먹을만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취미로 오르는 산행과 지도책을 만들기 위한 산행은 엄연히 달랐다. 재미가 아니라 고통이 시작됐다. 등산중 제대로 쉬는 법도 없었다. 산행시간을 재느라 걸음속도도 균등히, 한번이라도 쉬고나면 계산이 복잡해질까봐 허기도, 피로도 억지로 참고 행진만 계속했다.

산길에서 소름이 오싹했던 경험. 한밤중 원시림이 울창한 어느 산에서 내려올땐 너무도 적막하고 으시시해 자신이 밟는 낙엽소리에 스스로 소스라치며 떨었다.

검단산 지뢰지대 부근 출입금지지역에 이르렀을땐 한참동안 망설이다 들어선 뒤에도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듯한 불안감으로 내내 마음을 졸였다.

봉미산 산림도를 찾으러 갔을땐 산길을 찾는데 골몰한 채 아무 생각없이 산모통이를 돌다가 마찬가지로 맞은 편 모퉁이에서 멋모르고 건들거리며 나오던 노루와 마주쳐 서로가 혼비백산한 일이 있다.


길 잃고 헤매개 일쑤, 산행은 고역의 연속

119전화가 그처럼 미덥던 때가 없었다. 대부분 단독산행이라 언제나 조난사고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만약을 위해 등산중에 배낭에 방울을 달아 끈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표시했고, 이동때마다 수시로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전화해 현재 위치를 시시각각 알려두었다.

32년만의 폭설로 온 나라가 아우성이던 지난 겨울엔 특히 끔찍했다. 도무지 나서고 싶지 않던 길을 스스로 우격다짐을 하다시피 자신을 등떠밀여 길을 나섰다가 양평 청계산 속에서 허리위까지 파묻히는 눈더미를 헤치며 갖은 고생과 두려움에 떨었다. 후회막급했지만 이미 발을 뺄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도중에 길을 잃는 일도 있었다. 집에서 너무 서두른 나머지 장비 하나를 깜빡 빠뜨려 육감만 믿고 산에 오른 날이 있었다. 몇시간동안 산중 미아신세가 됐다가 비상식량이 동나고 해가 질쯤에서야 우연히 다른 등산객을 만나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에서 헤맨 것을 알았다.

각 시·군청의 문화공보과도 빠짐없이 들렸다. 유적이나 명소, 대중교통편 등 참고자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 자료로 얻는 얻는 도움은 극히 일부, 나머지는 직접해결하는 수 밖에 없었다. 버스노선번호를 적기위해 산이 아닌 등산로 입구 정류장에 죽치고 앉아 오가는 버스를 지켜본 날도 많다.

제 일도 제 일이지만, 산을 다니다가 뭔가 불편한 사항이나 잘못된 점들이 눈에 띄면 해당 지자체에 따로 건의하기도 하고 그 전엔 이름이 없던 산이나 바위, 샘, 봉우리의 이름도 직접 지어서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손폭포나 흑룡폭포, 노적봉, 삼두구암, 연인바위, 윤필봉 등 아마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많을 겁니다.

어늘 겨울엔가 한참 눈속을 다니다가 내려와 한 식당에 갔을땐 꽁꽁 얼어붙은 등산화에다 양말까지 젖은 저를 보고 그 집 주인이 장롱속에서 새 양말을 꺼내준 일이 있습니다. 참 힘든 하루였지만, 그 인정에 가슴 뭉클했지요.

산 아래에선 더 힘든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내용들을 옮겨 정리하는 것. 마냥 서툴었던 솜씨가 나날이 발전했다. 어쩌다 약국을 지키는 날에도 틈마나면 색색의 볼펜이나 싸인팬을 들고 종일 조제실 옆 책상에 않아 끊임없이 끌쩍여대는 그를 보고 손님들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이 집 약사님은 대체 뭘 그렇게 그리는 겁니까?'

누가 써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았던 책. 직접 들인 출판비용만 3,000만원이 나갔다. 돈은 돈대로 쓰고, 고생은 고생대로 원없이 했지만, 뭣보다 값비싼 보상은 건강이었다.

특히 젊은날부터 앓았던 심한 부정맥 증세가 달아났다. 지난 1981년 이후 악화된 병이었다. 당시 그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가진 것만 다 잃은 뒤 약국으로 돌아와 7년간 묵묵히 본업을 지키던 중 출마전후의 스트레스가 누적된 탓인지 부정맥이 나나났다. 가만히 있어도 가슴이 뛰고 이상한 불안감이 느껴지는 심장계통의 이상증세, 산에서 말끔히 사라졌다.


국내 서바이벌게임 동호인 중 최고령

또다른 위안은 '너 좋은 일 했다'는 친구들의 인사를 받을때다. '현대판 김정호'라는 별명도 듣기가 싫지 않다.

하지만 산에 정신을 팔고 있던 그 사이 그의 약국에 반갑잖은 새 변화가 들이닥쳤다. 경복고, 서울대 약학대학을 거쳐 1999년 KCPSA(코리아약과학원)에서 약국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평생 약사 손씨.

의약분업전엔 북적대던 약국이 분업후엔 눈에 띄게 한산해졌다. '병원과의 짝짓기'를 위해 40년 가까이 살아온 강동구를 떠나기로 했다. 행선지는 경기도, 8월쯤이면 자리을 옮긴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렸을 적 꿈은 조금씩 다 이뤄진 것 같습니다. 원래 정치인이나 건축가가 되고 싶었는데, 부노의 집안에서 크다가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뒤 장남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담임선생님의 권유대로 액대를 선택했거든요.

그 중 정치는 , 비록 정치판의 현실을 보고난 뒤 더 이상 애착이 없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선거에 출마한 일도 있고, 건축가가 되겠다던걸 결국 제가 우리집을 제 손으로 지으면서 그것대로 충족이 되더라구요.

다른 분들 것까지 부탁받은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외에도 재미있는 일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래뵈도 국내 서바이벌게임 동호회원들 중에 제가 최고령 회원이라고 합니다.

내일도 같은 동호회원인 사위랑 가서 한판 일전을 치룰 겁니다. 주로 20대나 3, 40대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6학년'으론 혼자 뛰려니 좀 뭣하긴 하지만 전투할땐 저도 젊은이들한테 양보없습니다.

현재 강동구지편찬위원으로도 활동, 향토사학자이자 산행작가로서도 이름이 빽빽하다. 최근엔 이번 산행관련 경험담들을 실은 홈페이지(www.mountainplay.com)도 개설해 네티즌 팬들까지 늘렸다.

산 다음 경유지는 강일까. 조만간 한강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옮기는 대하소설도 준비중이다. 철저한 계획파답게 이미 장기간 자료조사를 거쳐 초기구성까지 끝난 단계, 언제든 결심만 서로 곧바로 착수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온 손씨의 인생 60, 불꽃놀이가 막 시작됐다.

입력시간 2001/07/13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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