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진' 벼랑에 몰린 생보사

고금리상품 해지 유도, 편법영업 횡행

“어차피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는거잖아요. 언제 어떻게 사고를 당할지 누가 알아요? 암보험은 암에 걸리지 않으면 아무런 보상도 못받는 상품이예요.”

국제통화기금(IMF) 당시 A생명보험사 암보험에 가입했던 주부 최모(35)씨.

당시 친구의 소개로 알게돼 보험가입을 권유받았던 보험설계사로부터 얼마전 기존 암보험을 해지하고 종신보험에 가입할 것을 제의 받았다.

최씨가 암보험은 보장 범위가 제한돼있지만 종신보험은 평생을 보장한다는 보험설계사의 말에 솔깃해진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요즘 유난히도 언론 매체를 통해 자주소개되는 종신보험에 매력을 느껴 과감히 종신보험으로 갈아탔다.

그렇다면 최씨가 간과한 것은 없었을까. 최씨가 이미 가입하고 있던 암보험의 예정이율은 연 8.0%의 확정금리.

하지만 새로 가입한 종신보험은 예정이율이 연 6.5%에 불과해 매년 1.5%포인트의 금리를 손해본다는 점이었다.

물론 최씨가 다소 금리를 손해본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보험은 금리가 아니라 보장이 생명”이라는 보험설계사의 현란한 말 솜씨에 넘어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보험사 부실 주원인, 신규상품 예정이율 인하

‘절벽을 향해 달리는 기차.’ 한 정부 고위 관계자의 표현처럼 국내 생명보험사들이 시중금리 하락에 따른 역(逆)마진이 지속되면서 안으로 곪아들어가고 있다.

자칫 이 상태가 지속될 경우 1997년 환란 직후 금리가 치솟았을 때 판매했던 연 7.5~9.5%대 확정 고금리 상품의 만기가 몰리는 내년 하반기에서 2003년 사이에 국내 생보사들은 중대 고비를 맞을 수 있는 상황이다.

“최악의 상황까지야 가겠느냐”는 긍정론도 있지만 정부 일각에서는 저금리 쇼크로 7개 보험사가 파산한 일본식 결말을 우려하는 극단적인 시각도 제기된다.

생보사들은 이에 따라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기존 확정 고금리 상품의 해지를 유도하고 신규 보험의 예정이율을 인하하고 있다.

때문에 최씨처럼 상품 정보에 어두운 고객들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손해를 입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어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보험사들의 영업 행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말 현재 국내 21개 생보사의 자산운용수익률과 고객보장이율간 이차(利差)손실은 2조5,000억원 가량. 전년인 1999년에 비해 5% 가량 증가했다. 1997년 이후4년 연속 역마진을 기록한 것이다.

자산운용수익률은 96년 9.8%에서 지난해 4.7%로 ‘반토막’이 났지만 고객에게 보장해준 예정이율은 9.8%에서 7.8%로 소폭 줄어드는데 그쳤기 때문. 결국 시중금리 폭락으로 인해 보험사들이 고객 돈을 굴려 올리는 수익, 즉 자산수익률이 급감한 것이 보험사 부실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생보사가 판매한 상품 가운데 확정금리형 상품 비중은 현재 65%에 달해 앞으로 금리가 계속 떨어져도 이미 고객들에게 약속한 이자는 지급해야 할 처지. 이대로 가다가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인 셈이다.

국내 생보사의 위기는 일본의 경험에 비춰볼 때 더심각하다. 90년대 들어 금리가 급락한 일본의 경우 97년부터 올해까지 닛산, 도호 등 7개 중소 생보사가 파산했고, 3개 대형사도 현재 도산위기에 봉착해 있다.

90년대 전반까지 일본 생보업계는 금리 리스크 헤지(회피)형 상품 개발이 전무했고 급격한 영업 위축을 우려해 예정이율 인하에도 소극적이었다.

여기에 단기금리가 0%대로 떨어지면서 생보사들이 주식 등 고위험상품에 자산운용을 계속하고 신용위험이 높은 기업대출을 확대하면서 부실을 키워갔던 것. 감독 당국은 96년에야 적극 대응에 나서 준(準)유배당보험(이자차익 발생시에만 배당 실시), 금리연동형보험 등을 허용했다.

하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식 대처로 화를 잠재울 수 없는 법. 이미 곪을 대로 곪은 보험사들이 잇따라 파산하자 당국은 최근 과거 계약자에 약속한 예정이율을 소급 인하하는 극약 처방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보사 부실을 고객에 떠넘긴다는 거센 비판에 시달리고 있다.


대형 생보사들 기존계약 해지에 사활걸어

국내 생보사들이 일본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택한 해법은 ‘총체적 구조조정’.

인력을 감축하고 조직을 축소하는 전형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 금리연동형 상품 판매,예정이율 인하 등과 함께 기존 확정 고금리 상품의 계약 해지를 유도하는 등의 편법까지 동원해 부실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특히 확정 고금리 저축성 보험비중이 높은 대형 생보사들은 기존 계약을 해지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는 실정이다.

A사의 경우 최근 일선에 지침을 내려 이른바 ‘보험 계약 리모델링’을 독려하고 있다. 고객들에게종신보험의 이점을 부각시켜 연 10%에 달하는 확정이율을 제시한 기존 고금리 보험을 해지하고 예정이율 연 6.5% 정도인 종신보험 등으로 갈아탈수 있도록 설득하라는 것이 골자.

B사와 C사는 기존 고금리 계약 해지 실적이 높은 영업소와 지점에 운영비를 추가로 지급하거나 보험설계사 평점을 올려주는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객들이 황당한 피해를 입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직장인 이모(34)씨는 지난달 통장을 조회한 결과 2년간 납입하고 있던 배당부 연금보험의 계좌이체가 중지되고 무배당 종신보험 상품으로 예금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다.

보험사에 확인해 본 결과 담당 보험설계사가 이씨의 고객 정보를 이용해 기존 보험금 납입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종신보험에가입 약정을 한 것.

이씨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보험사가 개인 서명까지 도용해 고객 허락없이 새로운 보험 계약을 체결하다니 너무 어처구니 없다”며 “게다가 보험사측은 보름 가량 책임 전가만 하며 아무런 해결책도 내놓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보험설계사들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3년째 대형생보사에 몸담고 있는 보험설계사 강모(37ㆍ주부)씨는 “당장 평점에 영향을 미친다고 윽박지르는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대부분 친분이 있는 고객들인데 억지 권유를 하면서 죄를 짓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방카슈랑스 도입 등으로 입지 갈수록 축소

보험사들의 이 같은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미래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다.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마당에 생명보험 시장이 성장 한계에 봉착했다는 분석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미성숙한 채권시장 탓에 보험사 자산을 안정적으로 투자할 10년 이상 장기 채권이 없는데다 은행에 보험업을 허용하는 방카슈랑스 도입도 눈 앞으로 다가와 보험사들을 옥죄고 있다.

이제 생명보험 업계의 생사(生死)를 가늠짓는데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2년 안팎. 과연 생보 업계와 금융당국이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지 불안한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이영태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07/19 13:38


이영태 경제부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