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우익으로 가는 일본] 목소리만 높이는 '대일 보복'

교과서 왜곡· 우경화에 마땅한 대응카드 없어 속앓이

종착점을 가늠할 수 없는 한일관계의 냉각이 시작됐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시정거부로 시작된 한일 양국의 현 대립은 향후 어떤 파장을 만들며, 어떤 단계로 진입할지를 예단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 일본 연정3당의 간사장단 방문을 받은 한승수 외무장관이 데라다 일본대사(오른쪽 2번째)의 안내로 악수를 나누고 있다. <오대근/사진부기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남쿠릴 어장에서의 우리 꽁치잡이 어선들의 조업문제, 일본 참의원 선거,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의 예상 악재가 산적해 역사교과서 왜곡을 둘러싼 갈등은 쉽게 치유될 것 같지도 않다.

9일 일본 정부가 생색내기용 시정 사항을 우리 정부에 공식 통보한 이후 우후죽순으로 발표된 정부 대응책에 대해 일반국민은 만족스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방부의 한일군사교류 협력중단,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고립시켜려는 외교부 조치 등을 지켜본 국민은 보다 강경책을 주문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 정서는 현재까지의 정부 대응이 다분히 1단계 대응에 불과한데서 기인한다. 정부는 현재 대응의 수위를 상당히 낮춰 잡고 있으며, 한일관계의 전략적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는 않다.

즉 1단계 대응은 전술적인 셈이며, 대일관계의 전략적 변화에 아직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대응이 제한적이라면 이는 어떤 이유에서 일까. 우선 미국을 축으로 하는 한ㆍ미ㆍ일 동맹의 변화에 대해 정부가 변화를 모색하고 있지 않다. 김석규 전 주일대사는 “교과서 왜곡에 대응하면서 중국, 북한과 보조를 맞춰 우리가 그들과 한편인 것 처럼 비처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말했다.


일본대응 봐가며 수위조절

정부 당국자들도 같은 생각이다. 언론에서는 중국, 북한, 동남아 국가 등 일본 제국주의 피해 당사국들과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대응하는 방안을 정부가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정부 당국자들은 사석에서도 ‘국제연대’라는 용어를 절대 구사하지 않고 있다.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은 최근 국제연대 필요성을 질문받은 자리에서 “굳이 연대라고 얘기하지 않아도 이미 피해국들이 저마다 조치를 취하고 있으며 나라별로 대응이 다를 수 있다”고 현 대응의 수위를 분명히 했다.

한미일 동맹으로부터 이탈할 의사가 없으며 보수적 색채의 현 미 행정부로부터 오해받을 일도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안보 동맹 못지않은 변수는 한일관계의 밀접성이다. 지난해 양국의 무역규모는 522억달러에 달하고, 한해 양측을 오고가는 유동인구 규모가 250만명에 육박한다.

또 정부간교류보다 양측간의 민간교류가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상태이며 내년 월드컵도 공동으로 치뤄야 하는 형편이다.

이같은 한일관계의 구조적 성격을 감안, 김대중 대통령은 “일본 왜곡 역사교과서에 대해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섣불리 한일관계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가운데 일본의 대응을 봐가며 수위를 조절하라는 취지다.


교과서 이면에 도사린 우경화·군국주의화

이러한 제한이 현 국면을 통제하고 있지만 교과서 왜곡은 그 같은 제약의 한계를 넘나들 만큼 강한 파괴력을 지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12일 열린 정부의 왜곡대책반과 자문위원단연석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역사왜곡 문제는 한일관계의 근간으로 단호하고도 집요한 대응이 요구된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단호하고도 집요한 대응의 시한은 우리 정부의 성명에 포함된 것처럼 ‘왜곡이 시정될 때까지’이다. 장기전을 치르는 와중에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등 악재가 불거질 경우 사태는 걷잡을 수 없다.

더욱이 교과서 문제의 이면에는 일본의 급격한 우경화와 군국주의화가 도사리고 있다. 정부 당국자들은 10년간의 불황과 지도력 부재 때문에 일본사회가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으며, 일본정치 지도자들은 국민의 정서에 영합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유사법제 조기 정비 등 군국주의로 치닫는 행태가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으며, 이번 역사왜곡은 그 서막에 불과하므로 역사왜곡에 대한 단호한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또 군국주의가 가속화할 경우 장기적으로 한미일 안보동맹의 큰 틀도 훼손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따라서 현재 우리정부의 대응은 분명 전술적이지만 그 폭발력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제약과 폭발성을 염두에 두고 향후 전개될 한일관계와 우리의 대응은 매우 신중하면서도 차분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한국측 대응을 결정할 변수는 일본의 반응이 될것이다.

13일까지 1단계 대응책을 발표한 정부는 29일 참의선 선거과정에서 일본측의 성의표시 여부가 감지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눈치이다.

교과서 왜곡에 대한 일본측 공식발표후 일본 연립 3당 간사장들이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고 귀국하자 고이즈미 총리가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숙고해보겠다고 밝힌 대목은 향후 냉각국면을 풀 좋은 징후다.

또 고이즈미 총리가 최근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는 8월 15일 이후 잘 될 것”이라고 밝힌 점도 주목된다. 일본 여권은 고립주의적 노선을 통해 참의원선거에서 일단 승리를 챙긴 뒤 전향적인 대책을 내놓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일본이 교과서 왜곡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중국 등에게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해도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 정부와 중국은 역사교과서 왜곡이 시정될때까지 강경하게 대처한다는 단호한 자세이지만, 일본은 검정통과 교과서의 재수정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미봉책으로 문제를 풀여지가 적은 형편이다. 때문에 한 외교소식통은 “8월 중순이후 양국이 역사인식에 관한 충분한 논의를 통해 양국 국민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조치로 현 국면을 극복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는다.

군사협력 잠정중단 등의 조치를 취한 정부는 현재 2단계 대응으로 1998년 체결된 한일파트너십 파기 등 보다 강경한 조치를 검토중이다. 정부의 2단계 대응의 시기는 역사교과서에 대한 인식이 극명히 표출될 참의원 선거후 이뤄질 공산이 높다.


대일 강경조치, 일본엔 솜방망이에 불과

이번 일본 역사교과서 파문의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축은 국내 정치적 요소다. 일본의 경우 참의원 선거국면이 적지않은 변수이고, 우리의 경우 복잡한 국내정치적 분위기가 대일대응의 기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이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하향곡선을 그리는 김대중 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대일 강경 분위기를 부추긴다는 일본 언론의 분석 보도는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을 듯 하다.

현 한일관계 냉각의 안정적 관리가 국내정치적으로 여권에게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일부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편 이번 파동을 계기로 정부가 취한 대일대응책의 효과 문제도 짚어봐야 할 듯하다. 우리측이 취한조치로 일본이 어느 정도 아파했을까 하는 점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일 문화개방 연기, 국제사회에서의 일본 고립화 정책 등이 일본에게 치명타가 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의 반응은 대단히 회의적이다. 전문가들은 일본어 가창음반 등에 대한 시장개방연기는 한국을 교두보로 중국과 동남아로 진출하려는 일본측에 어느정도 피해를 줄 수 있겠지만 심각한 정도가 아니며, 국제기구 및 회의를 통한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제기도 치명적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한일관계 냉각으로 예상되는 일본 관광객들의 입국 감소가 우리측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보복은 아직 이 정도이다.

이영섭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7/19 14:26


이영섭 정치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