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9)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 정혁 박사(上)

"우리 약초는 고부가 천연식약 재료"

그는 너무 바쁘다. 대전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제주도로, 또 지리산으로 전국 방방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인터뷰를 하던 날 약속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찾았더니 그는 연신 "미안하다"며 회의를 계속했고, 짧은 인터뷰 후에도 사진을 찍는 둥 마는 둥하고 다음 약속 장소로 떠났다.

바쁘다는 게 결코 흠이 될 수 없건만 그가 자청해서 한 일은 아닌 탓인지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그래도 일단 맡았으면 최고가 돼야 한다는 신념에 군말없이 뛰어다니는 정혁(47) 박사를 보면 건강한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정 박사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 산하의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장이다. 말그대로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들을 이용해 인체에 도움을 주는 건강보조식품과 천연신약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연구실에도 자생식물에 관한 책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감수해 달라고 보내온 책들입니다.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 사업단이란 이름 때문인지 책도 많이 오고, 또 희귀한 풀을 하나 들고 와예로부터 유명한 약초니 성분을 분석해 달라는 분도 있고, 어떤 약초가 어디 어디에 좋다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오는 '신비의 약초'를 포함해 우리나라에서 자생식물로 규명된것은 4,200여종에 이른다.

이 중 현재 한반도에 존재하는 자생식물은 400여종.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산업화와 도시화, 불법채취 등으로 많은 자생식물들이 멸종위기에 처한 상태라고 한다.


인공씨감자 개발 12년, 이젠 자생식물 대부로

정 박사가 자생식물의 대부(代父)가 된지도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 과학기술부가 추진하는 21세기 프론티어사업의 일환으로 2000년 4월 사업단을 출범시키면서 자생식물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원래 그는 자생식물 전문가가 아니었다. 지난 10여년간 그가 몰두한 분야는 우습게도 테니스와 인공씨감자다. 생명공학연구원 밖에서는 정혁=인공씨감자였고, 안에서는 정혁=테니스였다.

"실험실만 왔다갔다하면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테니스공에 날려보내곤 했지요. 좋지 않습니까? 체력 단련도 되고, 기분 전환도 되고. 전 스포츠가 좋습니다.

물론 연구가 먼저지요. 테니스를 하다가도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곧바로 실험실로 달려가는 바람에 오해를 받은 적도 있지요."

그는 '뭔 일을 이뤄내려면 거기에 미쳐야 한다'고 믿는 타입이다. 그래서 테니스를 치다가도, 목욕을 하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번쩍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실험실로 달려갔다고 했다. 그렇게 개발한 게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인사로 만든 인공씨감자다.

인공씨감자란 생명공학을 이용해 품질을 개량한 감자를 콩알만하게 만든 것이다. 감자이면서도 크기가 작아 어디든지 쉽게 가져가 종자로 활용할 수 있다. 대량생산을 통한 상업화에도 성공해 중국과 러시아 등지로 수출하기도 했다.

무려 12년간이나 매달렸던 인공씨 감자 개발의 노하우는 이제 귀한 자료로 변해 그의 사무실 벽을 가득 메운 자료함속에 들어있다.

"여기에 12년간 혼을 바친 연구개발의 모든 게 들어 있습니다. 첫 기획안 작성에서부터 연구테마 분석, 연구개발 과정, 일지, 특허 청구 관련 자료, 사업화 과정 등 모든 자료를 이렇게 분류해 두었습니다."자료함을 뒤지는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린다.

인공씨감자 전문가였던 정 박사가 어느날 갑자기 자생식물이용기술개발사업단장으로 변신한다. 지난해 초의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연구원측과 밀고 당기는 실랑이도 있었다.

"어느 날 복성해 (생명공학연구원) 원장께서 자생식물사업단을 맡아달라고 했어요. 싫다고 했습니다. 인공씨감자 연구실을 멀쩡하게 잘 운영하고 있고 성과도 좋은데, 왜 내가 그걸 맡느냐고 했지요. 그랬더니 복 원장님은 인공씨감자는 이제 할만큼 했고, 후배를 이끌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설득했습니다."

1주일을 버티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이제는 연구소를 위해, 또 후배를 위해 일해야 할 때라는 대목에서 더이상 거부할 말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복 원장에게도 나름대로 노림수가 있었다. 자생식물사업단 프로젝트를 따기 위해 여러 대학과 관련 연구소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는데, 인공씨감자를 개발해 사업화에 성공한 정 박사를 내세우지 않으면 그 프로젝트를 따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복 원장의 기대대로 수월하게 그 프로젝트를 따냈고, 지금은 누구보다 열정을 갖고 뛰고 있다.


"인류가 직면한 각종 문제해결의 키는 식물"

"동의보감에도 나오듯이 우리의 자생식물은 그야말로 천연약초입니다. 대부분 몸에 좋은 보약으로, 치료제로 쓸 수 있어요.

또 수백년 내려온 비법도 다양하고, 노하우도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좋은 약초들을 부가가치가 낮은 한약재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특산품인 인삼만 해도 우리는 아직도 한약에 넣어 닳여먹지만 유럽에서는 유용한 성분만 농축해 약제화 했습니다. 첨단 생명공학을 이용하면 부가가치가 높은 천연신약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식물에서 신약을 찾는 연구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다. 생명과학의 발달로 식물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물의 유전자수도 대체로 동물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교적 단순한 식물인 벼 유전자가 5만~6만개로, 3만~4만개인 인간보다 많다고 한다.

"식물은 오랜 진화를 거치며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구조와 활성을 지닌 물질들을 만들어와 인류가 직면한 각종 문제를 해결하는 키가 될 것"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해열진통제로 유명한 아스피린을 예로 들어보자. 아스피린의 약효 성분이 버드나무에서 발견됐다. 선진국에서는 버드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화학약품의 부작용을 최소화한 천연아스피린을 개발중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계속>

이진희 사회부 차장

입력시간 2001/07/1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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