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과거에 대해 눈이 멀면…

문제의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일본의 각 지역 교육위원회에서 제대로 채택될 것 같지 않다.

한국일보 황영식 도쿄특파원의 보도에 따르면 문부성은 7월19일 전국 광역단체교육위원회 교육장에게 “교과서 채택이 외부압력이나 조직적인 운동에 좌우되지 않고 채택권자의 권한과 책임 아래공정하고 적정하게 이뤄지도록 철저히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황 특파원에 따르면 18일까지 전국 543개 교과서 채택지구 중 24개 지구가교과서를 채택했지만 문제의 ‘새로운’을 채택한 학교는 한 곳도 없다. 일본 내륙 도치기현의 시오츠가 지구내 공립중학교 역사 교과서 채택 공방전은 일단 시민단체측의 승리로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은 이 책을 편찬하면서 이 교과서의 점유율이 10%에 달할 것으로 기대했다.

‘새로운..’에맞서 ‘신(神)의 나라는 가라’, ‘새 교과서 반대 100만 서명운동’ 등에 나선 ‘전국네트 21’의 다하라 요시후미 사무국장은 이러한 성과에 대해 ‘일찍이 예가 없었던 시민운동 때문에 기대이상의 성과를 올렸다”고 기뻐했다.

또한 도치기현의 시민운동을 주도해온 다나카 가즈노리 사무국장은 “7월25일 재검토 회의에 앞서 우익들의 조직적 시위가 우려된다.

그러나 학부모들은 ‘이런 교과서는 문제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판매도서라면 몰라도…”라며 주부들의 지지가 컸음을 전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자유주의 사관 연구회’ 등에 대해 서울에서 반일(反日), 극일(克日)의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나 일본 우익의 이론과 목적에 맞설 그 무엇도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교과서 채택과정에서드러났듯이 오래 전부터 우익의 역사관에 맞서는 ‘모임’과 ‘연구회’와 지식인들이 활동하고 있다. 도치기현의 승리, 즉 7월18일까지 ‘새로운’을 채택한 학교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결과가 아닌 것이다.

승리의 견인차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1998년 4월30일께 ‘내셔널히스토리를 넘어서’라는 책을 동경대학교 출판회를 통해 펴낸 고모리 요우아치(도쿄대 일본문학 교수), 다끼하시데스야(도쿄대 철학교수) 등 18인, 도지샤 대학 인문과학 연구소가 92년 개최한 ‘과거 극복과 두개의 전후-일본과 독일’에 관한 공개 심포지엄을 94년 3월 책으로 출판할때 참여한 다나카 히로시(히도츠바츠대 사회학부 교수) 등 6인.

그리고 이 두책을 서울에서 출판한 삼인 출판사(대표 홍승권)와 두 책의 해설, 번역자 이규수 박사(광운대 강사. 히도츠바츠대 박사) 등을 들 수 있다.

31년생으로 최연장인 모치다 유키오(리츠메이칸대 정치과학부 교수)에서 62년생인 재일동포 이효덕 (후쿠오카 태생, 도교대 표상문화론 강의)까지 전쟁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지식인이다.

이들은 ‘새역사…’나 ‘자유주의자’들과 음모, 헐뜯기,욕설, 비방으로 싸우지 않는다. 이들은 역사인식의 차이를 놓고 ‘지유주의자’들과 다툰다.

이들이 애용하는 경구(警句)가 있다. 85년 5월8일 독일 바이체커 대통령이 종전 40주년을 맞아 국회에서 한 연설이다.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 맡지 않으면 안됩니다… 과거에 대해 눈을 감은자는 결국 현재에 대해서는 눈이 멀게 됩니다.”

바이체커의 이 경구를 역사인식의 밑거름으로 삼고있는 이와사키 마노루 교수(도쿄외국어 대학. 철학ㆍ정치사상가. 56년생)는 이번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주요 집필자인 사카모토 다카오교수(각인대 교수. 1991년 ‘시장ㆍ도덕ㆍ질서’로 산토리 학예상 수상)의 역사인식을 해부하고 있다.

이와사키는 “(사카모토의) 역사 서술은 독자에게 영웅숭배의 기분을 환기 시키고, 역사상 영웅을 (독자 자신과) 쉽게 동일화할 수 있도록만들어준다”며 “결국 사카모토는 각각의 개인과 시민을 ‘상상으로서의 국민국가’, ‘허구로서의국민의 역사’에 동화시켜가야 한다는 역사인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분석했다.

이와사키는 이런 사카모토류의 역사인식은 전후 50년이 지난 일본의 달라진 역사인식을 메이지 시대의 국가주의, 국민주의, 국민정사(正史)로 되돌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권의 책(‘파시즘의 상상력’, ‘총력전과 현대화’)의 저자인 이와사키는 사카모토가 개개인, 시민, 전쟁에 참가 했거나 참가하지 않았거나, 죽었거나, 살았거나, 그 자신과 후손들이 기억하고 들은 역사를 망각시키려 한다고 고발하고 있다.

사카모토는 일본인들의 역사인식을 ‘횡령’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한국, 중국, 아시아인에게도이를 강요하고 있다고 보고있다.

‘역사란 추상화한 국민의 역사이기 전에 무엇보다 구체적인개인의 역사’라는 진리를 일본의 ‘자유주의사관 연구회’ 주동자는 깨달아야한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07/2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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