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이 흩어진 현대호, 고난의 '살길찾기' 항해

핵분열 윤곽, 문제기업들 급한 불은 꺼

현대그룹 계동 사옥 뒤편 주차장 한 켠에 자리잡은 하치장에는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사무실 집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계열분리로 다른 곳으로 이전했거나 조직이 축소된 계열사들이 쏟아내는 주인없는 물품들이다.

최근에는 현대그룹의‘입과 귀’ 역할을 해오던 PR사업본부가 해체됐다. 그룹 광고와 기업 이미지 프로모션, 계열사간 업무조율 등을 해오던 조직이 사라진 것이다.

회장실이 자리한 12층도 썰렁하기는 마찬가지. 정몽헌 회장은 한 달에 한 두차례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주재하거나 금강산 사업과 관련된 보고만 받을 뿐 대외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매일 아침 6시 출근하는 것이 습관화돼 있지만 요즘은 아예 출근하지 않는 날도 있다는 게 현대 관계자의 전언이다. 점심 때면 12층으로 도시락이 배달되는 모습도 자주 목격된다.

직원 수가 줄고 빈 사무실이 늘어나면서 인근 식당가들은 파리 날린다며 울상이다. 이래저래 계동사옥은 안팎이 을씨년스럽다. 한국 경제의 바다에 떠다니는 최대 ‘빙산’ 현대호는 지금 어디로가고 있을까.


계열사별 핵분열 가속

하반기에 접어들면서 현대그룹 구조조정의 핵심인 계열분리작업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하이닉스반도체(옛 현대전자)의 계열분리와 현대건설의 출자전환 및 계열분리신청, 현대투자신탁증권의 해외매각 등으로 현대계열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몽헌 회장도 자신이 갖고 있는 지분범위 안에서만 이들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뿐이다. 지주회사격이었던 현대상선도 활발한 지분정리를 통해 독립경영을 앞당기고 있다.

구조조정이 진행중인 현대그룹 27개 계열사 가운데 핵심기업들은 대부분 연말까지 홀로서기를 마무리할 전망이다.

하이닉스반도체의 계열분리는 6월말 시한을 넘겼지만 이달 중 해결될 전망이다. 현대측은 현대투신증권ㆍ현대증권 매각이 다소 지체되고 있으나 곧 성사될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대석유화학은 대주주의 경영권 포기로 현대건설과 같이 조만간 출자전환된 뒤 그룹에서 떨어져 나갈 운명이며, 연말까지 계획됐던 현대중공업의 계열분리는 앞당겨질 가능성이 커졌다.


홀로서기 가시밭길

하이닉스반도체는 최근 해외주식예탁증서(GDR) 12억5,000만달러 발행으로 유동성 위기를 넘겨 계열분리 후 독립은 시간문제로 보고 있다.

특히 보유중인 유가증권이 1조6,000억원 정도 남아 있고 내년도 채무조정을 위해 전환사채(CB)를 1조원 정도 발행해 대비하고 있어 더 이상 유동성 문제는 없을 것으로 회사측은 보고 있다.

문제는 반도체 가격. 세계적인 가격 폭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반도체 경기가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지 않으면 하이닉스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하이닉스는 반도체 불황과 이자부담, 투자손실, 재고자산 증가 등 악재가 겹치면서 올 2분기에만 1조2,77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현대석유화학은 2조6,000억원 규모의 부채와 외자유치 실패로 고전하고 있다.

그러나 대주주인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추가지원 대신 완전감자를 수용,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실시한 후 10월까지 제3자에 매각할 가능성이 커졌다. 회사 관계자는 “매각될 경우 국내에선 롯데계열의 호남석유화학등 2~3개사와 덴마크의 보레알리스사가 유력한 인수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고 말했다.

채권단으로부터 2조6,594억원을 수혈받아 한고비를 넘긴 현대건설도 아직 불투명하긴 마찬가지다. 현대건설은 6월 말 공정거래위원회에 계열분리를신청, 조만간 그룹에서 공식 분리될 전망이다.

2조원 규모의 대출금은 연말까지 만기 연장돼 자금사정은 일단 좋아졌지만 당초 채권단의 지원계획보다 2,406억원이 모자라 부채비율 300%미만 달성에는 실패해 하반기 공사수주에 어려움이 예상된다.

또 국내 건설경기가 크게 좋아지지 않는 데다 최저가 낙찰제 도입으로 공공공사의 수익성이 떨어질 전망이어서 영업여건이 순탄치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상선 등은 순항

기대 현대투신증권 매각협상은 6월 말 시한을 넘겼지만 이달 중에는 결론이 날 가능성이 크다. 현대측이 매각 전제조건인 현대증권의 지분을 미국 AIG측에 넘기기로 하고 협상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증권 주식 1,782만주(16.6%)를 1주에 1만6,000원씩 2,852억원에 매입했던 현대상선이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 매입가격 인상을 요구하고 있어 협상이 길어지고 있다. 현대증권과 현대투신. 현대투신운용이 AIG에 인수될 경우 국내 증권산업에 큰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그동안 정몽헌회장 계열의 지주회사 역할을 맡아왔던 현대상선은 금강산 사업을 현대아산에 넘기는 등 부실 계열사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지분을 팔아 재무구조도 개선하면서 독립경영을 향해 순항하고 있다.

채권단은 올 연말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금융권 여신 1조원을 만기연장해주기로 했다. 현대상선이자구노력을 통해 2조9,000억원의 빚 가운데 1조원을 줄이고 정몽헌 회장이 지분포기 각서를 낸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현대상선은 구조조정과 부채감축을 위한 외부 컨설팅 결과가 나오는 8월께 독립경영체제를 공식화하고 본업인 해운업에 전념할 계획이다.


MJ의 중공업딴살림 앞당겨

현대중공업은 걸림돌 중 하나였던 현대석유화학 처리와 현대상선의 중공업 지분 매각 문제 등이 빠르게 해소돼 연말예정인 계열분리가 앞당겨질 전망이다.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12.46%. 947만주)였던 현대상선이 최근 중공업 보유지분 400만주를 매각하는 등 지분 전량을 단계적으로 매각하고 있어 곧 계열분리 조건이 충족될 전망이다.

이 가운데 상당부분을 정몽준(MJ) 고문이 인수, 사실상 최대주주(11%)로 올라섰다. 현대 구조조정위원회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현대차에 이어 현대중공업마저 분리되면 옛 현대그룹의 구조조정은 사실상 막을 내리는 셈” 이라며 “이후 남게 되는 10여사는 소그룹으로 운영을 해나가게 될 것” 라고 말했다.

김호섭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07/25 11:57


김호섭 경제부 dream@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