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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중고 어선이 북한 공작선으로 둔갑

일본 중고 어선이 북한 공작선으로 둔갑

밀수출돼 개조, 침투·정보수집 등에 이용

1999년 3월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노토(能登)반도 앞바다에 괴선박 2척이 나타났다.

‘제2 야마토마루(大和丸)’,‘제1 다이세이마루(大成丸)’라는 한자 이름이 적혀 있는 등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본 어선이었다.

그러나 해상보안청 순시선은 물론 해상자위대 호위함의 추격까지 따돌릴 정도의 고성능 엔진은 어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상보안청과 해상자위대의 위협·경고 사격을 무시하고 유유히 공해로 빠져 나갔다. 최종적으로 북한 항구에 들어감으로써 북한의 위장 공작선으로 판명됐다.

이 사건은 해상 검문을 거부하고 달아나는 선박은 해상자위대와 해상보안청이 선체를 직접 사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일본내 논의를 부쩍 앞당겼다.

한편 공작선 1척의 일본 ‘원적’이 드러나 ‘북한이 일본 어선을 밀수입, 공작선으로 개조해 왔다’는 소문이 사실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해상보안청은 전국 11개 본부에 ‘수출 어선 실사 강화’를 지시했다.


서류엔 인도네시아 수출, 행선지는 북한

지난해 6월경 후쿠시마(福島)현 고나하마(小名浜)항에서 인도네시아로 수출될 예정이던 중고 오징어잡이 어선(130톤)을 검사하던 해상보안관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려야 했다.

서류상 인도네시아에 수출될 어선인데도 동남아 해역 관련 자료가 거의 없었고 선미에 걸린 인도네시아 국기도 위아래가 거꾸로였다. 더욱이 인도네시아까지는 5,500㎞나 되고 최소한 2주일이 걸리는 데도 승무원 3명의 식량이라고는 약 3일분의 도시락종류와 2ℓ짜리 생수 10병이 고작이었다.

해상보안관의 물음에 동행했던 중개인은 “북한으로 갈 배라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이 정보는 즉각 세관으로 통보됐고 세관은 정비 불량 등을 이유로 출항을 중지시켰다.

그러나 북한으로 간다는 정보는 확인되지 않았고 두 번째 실사에서는 정비 상태도 완벽해 더 이상 발을 묶어 둘 수가 없었다. 8월 6일 어선이 고나하마항을 빠져 나가면서 해상보안청은 즉각 추적에 들어 갔다.

어선은 가고시마(鹿兒島)앞바다까지 남하한 후 선수를 북으로 돌리면서 “기관고장으로 한국에 잠시 들리겠다”고 무선으로 연락하고는 한국으로 향했다.

해상보안청의 요청으로 감시에 나선 한국 당국은 문제의 어선이 8월 중순 동해안의 묵호항에 기항했다가 같은달 하순 북한으로 향했다고 알려 왔다. 일본인 승무원은 동남아인으로 교체된 후였다.

최종 행선지는 북한 해군기지가 있는 김책항(구 성진항)인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 조선업 거점의 하나이기도 한 김책항 입항은 중고 어선을 위장 공작선으로 개조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른 일본 당국의 수사는 극히 조용하고 치밀하게 진행됐다. 거의 1년이 지난 6월 하순에야 도쿄(東京) 경시청 공안부는 관련자 6명을 잇달아 구속하고 본격 조사에 나섰다.

북한이 관여한 사건은 자칫 ‘날조극’이라는 역공을 부를 뿐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 결과 적어도 지난해 오징어잡이 어선의 대북 밀수출은 전모가 드러났다.

당국은 관련자들의 역할 분담이 극히 조직적이고 국제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다른 수십척의 어선이 이들의 손을 거쳐 북한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서두르고 있다.


한국인 선박브로커가 중개

경시청 공안부에 따르면 문제의 오징어잡이 어선은 평양의 한 기업이 지난해 3월 고베(神戶)시의 조총련계 무역회사 ‘동아기술공업’에 발주했다. ‘100~200톤급의 어선을 2,000만~3,000만엔으로 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발주한 북한 기업은 흔히‘3호 청사’로 불리는 노동당 비밀공작기관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데 한일 양국 정보소식통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동아기술공업은 96년4월 사린가스의 원료로 쓰일 수 있는 화학물질을 북한에 밀수출한 것으로 드러나 담당 사원이 구속된 바도 있다.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조총련계 김기민(52)사장이 나시마다 도시카즈(島田利一·54)부장은 북한의 신뢰가 두터운 반면 일본 공안 당국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이들을 대신해 배를 조달하고, 수출 절차를 밟고, 몰래 북한으로 반입하는 일을 맡은 것은 부산에 사는 한국인 선박브로커 윤경중(51)씨였다.

그는 95년 가을 일본 해운업자들에 중고 어선 조달을 의뢰, 이듬해 어구를 제거한 화물선 형태로 북한 무역회사에 합법적으로 넘기는 등 북한과의 관계가 깊다. 스스로도 “베이징(北京)주재 북한 대사관 관계자와 언제든 연락이 닿는다”고 이를 강조해 왔다.

한편으로 그는 “한국 정보기관으로부터 특별한 허락을 받아 두었기 때문에 언제든 북한에 갈 수 있고 북한에 갔다 온 후에는 한국 정보기관에 보고하러 간다”며“남북한의 2중간첩”이라고 떠벌리기도 했다.

일본 선박 업자들은 그를 대북 수출 상담의 창구로 여겨왔다. 그는 인도네시아에 해운회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체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그의 주문에 따라 미야기(宮城)현 ‘마쓰시마(松島) 해운’이 어선과 한국까지 운반할 승무원을 찾았다. 사장 기시모토 요지(岸本洋二·59)와 담당사원 사토 다쿠(佐藤拓·34)는 후쿠시마현에서 적당한 배를 찾아 사들였다.

한편 마쓰시마 해운이 이 어선을 윤씨의 인도네시아 회사에 수출하는 것처럼 꾸민 거짓 서류를 통산성과 수산청에 제출하는 대행업무는 사이타마(埼玉)현 ‘아카가네 해운산업’의 마에다준페이(前田純平·67)사장이 맡았다.

이들은 모두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군용으로 전환 가능한 물자 등 대북 수출은 통산성(현재는경제산업성) 장관의 허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어겨도 간첩죄 등 다른 처벌 규정이 없는 일본에서는 외환관리법 위반이나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의 적용이 고작이다.


대북 어선 밀수출 이미 20년전부터 성행

일본의 북일무역 관계자들 사이에 대북 어선 밀수출 움직임은 20년전부터 있어 왔다. 북한의 조선 기술 낙후가 기본 요인이지만 일본의 어선 관리체제가 비교적 허술한 데다 위장 공작선으로 쓰기에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83년 7월 중고 연어잡이 어선의 대북 밀수출이 적발된 이후 이번 사건까지 표면에 드러난 사건은 없었다.

문제의 오징어잡이 어선 밀수출 사건을 추적한 해상보안청의 조사 결과 아카가네 해운산업이 제출한 서류는 조금만 신경을 써서 들여다 보면 금세 엉터리임을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인도네시아 정부 발행의 선적 증명서의 공인이 아카가네 해운산업이 과거에 썼던 서류에서 복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른 기재 사실도 해사 지식만 있으면 서류 신청 단계에서 간단히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엉성했다.

그러나 실제 심사를 맡은 수산청은 어획량의 편중 등 어업 차원에 관심을 두었을 뿐 선박 매매 계약의 진위 여부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 같은 서류를 제출받은 경제산업성은 수출 통계가 목적일 뿐 수산청의 승인이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엉성한 틈을 뚫고 99년 공작선 침투사건 이래 최소한 48척의 중고 어선이 북한에 넘어갔고, 이중 상당수는 공작선으로 개조됐을 것으로 일본 공안 당국은 보고 있다. 일본인 납치 사건과 공작원 침투 사건에서는 늘 주변 해역에 일본 어선처럼 보이는 북한의 공작모선이 나타났던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의 어선을 발주한 평양의 기업이 노동당공작기관과 관계가 깊은 데다 청진항과 함께 공작선 기항지로 유명한 김책항에 입항한 것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했다.

북한의 공작선은 공작원 침투·귀환, 연안에서의 통신정보 수집, 각성제 운반 등에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 졌으며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 근해에서 자주 출몰했다.

이 때문에 김기민, 윤경중 등 핵심 피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공작선 개조 및 운용 실태가 보다분명하게 드러날 것인지는 일본 뿐 아니라 한국 당국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황영식 도쿄특파원 yshwang@hk.co.kr

입력시간 2001/07/25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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