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대란] "악덕 건물주를 리모델링하라"

재건축 악용으로 권리금 떼이고 파산하는 영세상인 속출

서울 광진구 군자 전철역 부근에있는 빌딩 1층에서 종합화장품 가게를 운영하는 A(34)씨는 한달 째 밤잠을 못 이룬다. 유치원에 다니는 두 아이와 아내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단란했던 A씨 가족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 건물 관리인으로부터 “리모델링을 하려고 하니 가게를 비워 달라”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으면서 부터다. 청천벽력 같은 요구에 A씨는 “요구하는 만큼 가게 세를 올려줄테니 제발 나가라는 말만은 말아 달라”고 애원했으나 건물주측은 계약이 만료된 7월초 “당장 나가라”며 법원에 명도 소송을 내버렸다.

A씨는 자구책을 마련하려고 뛰어다녔지만 임차인을 보호해 주는 법이 없어 현재 자포자기 상태에 있다. A씨는 5년전 노동일을 하는 아버지의 집을 처분하고 받은 돈으로 권리금 8,800만원을 마련,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102만원의 조건으로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이 곳은 지하철 5호선과 7호선을 건설을 하느라 어수선했지만 공사가 완공되면 장사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간의 불황을 묵묵히 견디어 왔다.

더구나 그는 지난해 8월 “더 이상 재건축은 없으니 걱정 말고 장사나 잘하라”는 건물주의 말만 믿고 3,500만원을 들여 가게 수리까지 마친 상태였다.

“리모델링 해야하니 가게 비워라”날벼락

그런데 공사가 끝나 이제 막 장사가될 만 하니까 건물 관리인이 돌연 리모델링이라는 명분을 들이 대며 쫓아내려는 것이다. A씨는 “건물주가 입점 상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새로 임대를 놓으면서 휠씬 높은 임대 보증금을 챙길 수 있기 때문에 기존 가게들을 내보려고 한다“며 “임차인을 벼랑 끝으로 모는 건물주와 약자를 보호해줄 법 하나도 없는 이 나라가 원망스럽다”고 울먹였다.

권리금 8,800만원을 고스란히 떼일 처지에 놓인 그는 다른 곳에서라도 장사를 해보겠다는 생각에 현재 살고 있는 16평짜리 아파트 전세금 4,500만원을 뺐다. 보증금 500만원에 월 40만원인 월셋방으로 옮기거나 아예 13평짜리 아버지 월셋방으로 들어갈 계획이다.

최근 유행하는 건물 리모델링으로 인한 세입자 피해가 날로 심각해 지고 있다. 본래 리모델링이란 노후된 건축물의 뼈대인 구조물(30%)은 그대로 둔 채 내ㆍ외장 및 전기 설비 등을 고쳐 건물의 가치와 기능을 높이는 일종의 소규모 재건축.

신축이나 전면적인 재건축과 달리 폐자재 등이 적게 발생하고 비용도 저렴해 1~2년 전부터붐을 이루고 있다. 특히 리모델링은 건물 신축과 달리 주차공간 확보 규정이나 강화된 용적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데다 각종 인ㆍ허가도 간편하다.

리모델링이 특히 각광을 받는 이유는 건물주에게 주어지는 높은 프리미엄 때문이다. IMF 한파 이후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지방법원에는 기업 도산이나 개인 파산으로 인해 경매으로 나온 중ㆍ소형 건물들이 홍수를 이뤘다. 당시 부동산 컨설팅사들은 이런 경매 건물을 싼값에 낙찰 받아 리모델링한 뒤 재임대 해서 고수입을 올리는 방법을 최고의 재테크로 장려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성공한 사례가 언론을 통해 잇달아 소개되면서 리모델링은 아파트 재건축과 함께 주(住)테크의 핵심 테마로 부상했다. 올해 초에는 경매 건설팅사가 주관하는 리모델링에 사설 펀드 수십개가 설립될 정도로 시중 자금이 몰리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하지만 이런 리모델링을 일부 부도덕한 건물주들이 악용하면서 문제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국내 상가 임대차 시에는 건물주에게 주는 임대 보증금과 월세 이외에 권리금이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다.

상가 권리금이란 그 장소에서 장사를 해온 기존 상인이 시설비를 들여 일정 고객을 확보한 것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 돈으로 지급해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상거래 관행에 따른 사적인 거래 행위지 법적으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보호 받지 못하는 돈이다.

싼값 낙찰→리모델링→재임대→고수익

리모델링의 폐해는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일부 악덕 건물주들이 기존 입점 상인들을 쫓아 내기 위한 편법으로 리모델링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주 입장에서 기존 세입자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임대료의 상승을 의미한다. 리모델링한 새 건물에 입주하는 세입자들은 기존 세입자가 없기 때문에 권리금을 낼 필요가 없다. 보통권리금은 임대 보증금의 2~3배에 달한다. 따라서 새로 임대를 주는 건물주는 권리금이 없이 새롭게 단장한 건물에 들어 온다는 명목을 들어 임대료를 높여 받을 수 있다.

한 예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0만원이던 모 상가의 가게 자리가 리모델링 후에는 임대료가 보증금 3,000만원, 월세 200만원으로 두 배 이상 올랐다. 이 경우 신규 입점자는 기존에 있던 3,000만원의 권리금을 안내도 된다는 점 때문에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리모델링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은 기존 세입자들이다. 이들은 단지 건물의 외형이 조금 달라진다는 이유로 권리금 한푼 못 받고 거리로 내몰린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문제가 생기는원인은 다름 아닌 상대적 약자인 상가 임차인을 보호해주는 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거주 주택의 경우 주택임대차 보호법이 있어 세입자의 권리를 일정 부분 보호해 준다.

하지만 아직 상가 임차인에 대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아 세입자들이 일방적인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현행 민법은 임대 계약이 자동으로 연장된 묵시적 계약 갱신의 경우 건물주는 계약 만료 후 명도 소송만 내면 6개월 후에 합법적으로 세입자를 내보낼 수 있다. 반면 세입자들은 계약일이 지나면 건물주의 요구에 합법적으로 대항할 아무런 장치가 없다.

서울 은평구 S상가 1층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B(59)씨는 두 달 가까이 가게 문을 닫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 B씨는 5년전 권리금 5,000만원에 보증금 1,200만원, 월세 90만원의 조건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5월말 건물이 팔려 새 주인에게 넘어가면서 6월초 새 건물주로부터 “리모델링을 하려고 하니, 나가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B씨는 “제발 장사만은 계속하게 해 달라”고 통사정했으나 건물주는 “식당은 지저분해서 안준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건물주는 그러나 같은 층에 있는 편의점과는 리모델링 후 현재 보증금 1,500만원에 월세 92만원이던 것을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150만원으로 두 배 가량 올리는 조건으로 잔류에 합의했다.

리모델링의 이유가 세를 올리려는 것임이 드러난 것이다. B씨는 현재 문을 닫고 노동단체나 세입자 모임 단체를 전전하고 있다. 그는 “건물주가 리모델링이란 편법으로 기존 세입자들의 권리금을 사실상 착복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시민단체 등서 법적 보호장치 마련 추진

이처럼 리모델링을 이유로 한 영세상인들의 피해가 잇따르자 참여연대, 민주노동당, 전국임차상인연합회는 최근 상가임대차보호공동운동본부를 결성, 국회에 상가임대차보호법에 대한 조속한입법 압력을 가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세입자들이 권리금을 회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을 법적으로 보호하도록 하는 세입자 계약갱신청구권을 신설하라는것이다. 건물주가 퇴거를 요청하더라도 세입자가 최소 3~7년 정도 장사를 계속할 수 있도록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이법은 국회 법사위에 계류중에 있다.

그간 상가임대차보호법은 기득권층의강한 로비와 ‘상당수 거부 장사꾼들의 이익까지법으로 규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나’ 하는 정서 때문에 차일피일 미뤄져 왔다. 하지만 최근의 리모델링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피해는 거의영세 상인들에 집중돼 있다. 시민단체들의 조속 입법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7/31 14:06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