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대란] "전세 얻기, 복권당첨만큼 어렵네요"

사상 유래없는 품귀현상, 주택정책ㆍ저금리 등이 '대란'불러

벤처회사 직원인 전홍국(38)씨는 내 집 없는 설움을 요즘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이 없다.

전씨는 2년전 서울 송파구 가락동 우성아파트19평형에 5,500만원의 전세금을 주고 입주 했다. 주차공간 부족 등 다소 불편했지만 출퇴근이 용이해 전씨는 2년 정도 이곳에서 더 거주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재계약을 두 달여 앞둔 지난달말 집주인이 터무니 없는 제의를 해왔다. 이 집에서 계속 살려면 보증금 4,000만원에 월 50만원의 월세로 전환하라는 것이었다.

최근 월세 전환 이율이 월 1부(연12%)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전세금을 9,00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얘기인 셈이다. 어이가 없어 인근 아파트를 둘러 본 장씨는 또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 아파트 전세가 엄청나게 폭등한 데다 20평형대 소형 아파트 전세 공급물량은 벌써 몇 달전부터 자취를 감춘 것이었다.

서울을 포기하고 분당, 수지쪽까지 찾아 봤지만 그곳 역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씨는 이사날을 한달 정도 남기고 있지만 아직 아내와 5살 된 딸아이, 첫돌배기 아들 등 네식구가 살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부동산 업소마다 전세 대기자 100명 넘어

전세 대란이 벌어지고 있다. 예전같으면 부동산 거래 휴지기였던 한여름 휴가철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수도권과 신도시를 중심으로 사상 유례 없는 전세 품귀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강남일대에서는 이미 올해 초부터 일부 대형 평형을 제외한 중소형 아파트 전세 매물이 자취를 감췄고, 이 같은 추세가 지난달부터는 강북과 주변 신도시와 지방 광역시쪽으로 전이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K부동산. 평일 낮인데도 전세 매물을 찾는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고 걸려 왔다. 부동산 중개소의 대표는 ‘혹시 나오면 연락 할테니, 매물 등록이라도 하라’며 전세 구입 희망자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노트에 기록한다. 대여섯 페이지에 걸쳐 깨알 같이 적혀진 전세 구입자 명단은 언뜻 봐도 백명은 넘어 보였다.

이 주인은 “강남 인기 지역에서 전세를 얻는다는 것은 복권에 당첨되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나오는 물건이 없어 한 달에 한 건을 성사시키기도 힘들다”며 “요즘에는 주머니에 현찰을 넣고 다니거나 아예 가계약금을 부동산에 맡긴뒤 아무데나 나오는 대로 계약해 달라는 사람들이 늘고 있지만 이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강남 요지인 서초동의 경우 전세가는 올해 초에 비해서 전체적으로 20% 가량 올랐다. 올해 3월경 9,500만원 수준이었던 우성아파트 25평형의 전세가가 지금은 2,500만원 가량오른 1억2,000만원이나 한다.

33평형도 1억3,000만~1억4,000만원 하던 것이 지금은 1억7,000만원에 육박한다. 이것도 전세 물량은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이 월세다. 월세는 25평형이 2,000만원 보증금에 월 100만원, 33평형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 130만원 수준이다.

지금은 월세마저 물량이 적어 나오는 즉시 나가 버린다. 무지개 공인중개사의 김광수 대표는 “전세 거래는 한 두달 전부터 완전 전멸이다”며 “특히 이 지역은 교통이 편리하고 초등학교 학군이 좋아 고가의 월세 물건도 나오기만 하면 바로 나가 버린다. 강남에서 전세를 구하는 것은 친ㆍ인척 같은 특수 관계인 사이가 아니면 힘들다”고 말했다.

비교적 전세 물량이 여유가 있는 강북지역도 예전과 달리 전세 구하기가 만만치 않다. 3년전만 해도 4,500만원이면 전세 물량이 남아 돌았던 도봉구 쌍문동 신동아 아파트 29평형이 지금은 두배 가량 오른 8,500만원을 호가한다. 그나마도 월세만 조금 여유가 있을 뿐 전세 물량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수도권의 경우 강남보다 약간 나은편지만 추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경기도 일산 신도시의 주엽동 문촌마을 쌍용아파트 전세의 경우 24평형이 올해초 6,500만~7,000만원이었던 것이 지금은 7,500만~8,000만원대로 상승했고, 33평형도 1,000만원 오른 1억1,000만원대를 호가한다.

이는 IMF 한파 직전의 가격대를 넘어선 수준이다. 더구나 이런 고가에도 불구하고 전세 물건은 예약하고 한달 이상을 기다려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일산 부동산의 장태호 대표는 “서울에서 시작된 전세 파동이 한두달 전부터 신도시에도 파급되기 시작했다”며 “1~2년전만 해도 전ㆍ월세 비율이 9대1로 전세가 절대 강세였는데 지금은 4대6으로 그 비율이 역전 됐다. 갈수록 월세 비율이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부동산 업계의 조사에 따르면 7월셋째주 한 주 동안 아파트 전셋값은 서울 0.33%, 일산 1.08%, 분당 1.06%, 평촌 2.25% 등 폭등 양상을 보였다. 전셋값 상승은 매매가까지 부추겨 한 주 동안 서울 0.39%, 신도시 0.48%, 수도권 0.30%가 오르는 동반 상승세를 이어갔다.

집 소유주 ‘전세 기피ㆍ월세 선호’

전세 파동의 원인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 중에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을 꼽으라면 ‘전세 기피, 월세 선호’ 성향이다. 소유주 입장에서 전세 보다 월세가 훨씬 높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월세가 늘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우리 경제구조는 만성적인 고금리 상태에 있었다. 돈을 빌리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시절, 전세 대금은 목돈을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였다. 당연히 전세가 선호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IMF 한파가 잠잠해질 무렵인 1998년말부터 우리 경제는 사상 처음으로 한자릿수 금리 시대를 맞는다. 이런 저금리 정책이 2년여간 지속되면서 그 여파는 부동산 시장에도 미치기 시작했다.

불과 2~3년전만 해도 전세의 월세 전환 이율은 연간 24%(월2부)였다.

그러다 저금리 기조와 함께 전환 이율도 내려가기 시작해 현재는 연간 12%(월1부) 수준이다. 이는 현재 시중 은행의 1년짜리정기 예금의 거의 두 배가 넘는 이율이다. 현재 1년짜리 정기 예금의 금리는 연 5.9% 수준으로 이중에서 이자 소득세 16.5%를 제하고 나면 실제 손에 들어오는 이율은 5%에 불과하다.

건교부가 올해 5월 표본 조사한결과에 따르면 월세 전환율은 올해 3월(38%)에 비해 두달만에 5%가 늘어난 43%로 증가했다. 지역별로는 서울 강남구가 65%, 노원구50%, 분당 50% 등이었다. 현재는 이보다 훨씬 증가한 것으로 파악 된다.

주식 시장의 침체도 한 몫을 한다. 장기간의 불황으로 갈 곳을 잃은 여윳돈들이 부동산 임대 사업쪽으로 흘러 들어가 월세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철강 등 우리 경제를 견인해가던 업종들이 잇달아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외국인들과 기관, 최근에는 개미들까지 주식시장을 빠져 나오고 있다.

더구나 지난달 부동산신탁이 지난해 금융권최고의 시세차익을 올렸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부동산쪽이 대체 재테크 방법으로 부상하고 있다. 금융계의 큰손들도 임대 사업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부동산 임대사업의 경우 월세가 시중 어느 금융기관의 이율보다 높을 뿐 아니라 보증금 일부를 받기 때문에 부실 채권이 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안전한 재테크로 꼽히고 있다.

정부, 뒤늦게 소형주택 의무비율제 부활

정부가 1998년 민간용지에 짓는공동주택 건설이나 재건축시 소형 주택을 의무적으로 짓도록 규정한 소형주택 의무비율제(서울 30%, 경기 20%)를 폐지한 것도 한 이유가 됐다. 소형 의무 비율제가 사라지면서 강남 저밀도 지역의 아파트를 비롯한 수도권 노후 아파트들의 재건축이 러시를 이뤘고, 그것이 자연적으로 전세 수요를 촉발 시켰다.

더구나 IMF 이후 건설 경기 위축으로 절대적인 아파트 공급 자체가 크게 줄어든 상태에서 소형 평형이 거의 지어지지 않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지금의 소형 아파트 전세 파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런 부작용을 인식한 정부는 7월26일 이 제도를 다시 부활 시킨다고 발표했지만 다분히 사후약방문 식의 대응이 아닐 수 없다.

LG경제연구소의 김성식 박사는 “소형 평형 아파트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와 저금리 영향으로 향후 1~2년간 전세와 매매가가 지속적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며 “정부가 경기 부양을 위한 그간의 주택 건설 정책을 버리고 서민 위주의 실질적인 방향으로 정책을 펼쳐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7/31 14:11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