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은행 '김정태 호' 파고 높다

조직융화 등 난제 산적, 파벌형성 우려도

“우리는 합병은행장을 이끌어가는데 그래도 조금 젊은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7월 26일 오후1시께 서울 은행회관 2층 국제회의실. 김병주 국민ㆍ주택 합병추진위원장이 100여명의 취재진 앞에서 10여분간의 장황한 서언을 끝낸 뒤 국민ㆍ주택 초대형 합병은행장에 김정태 행장이 선출됐음을 선언했다.

지난해 12월 두 은행의 합병 발표가 있은 뒤 무려 7개월여간 치열한 격전의 종료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두 은행 관계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합병은행장이 선출되기까지 숨막혔던 24시간 동안의 드라마를 들여다보자.

팽팽하던 싸움 ‘뉴욕 낙점’ 전해지며 기울어

시계를 정확히 24시간 전으로 돌린 25일 오후1시. 국민, 주택 두 은행 내부에 이상 기류가 감지됐다. 김상훈 국민은행장이 합병은행장에 내정됐다는 이야기가 정설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 국민은행 한 임원은 모 신문사 편집국장으로부터 축하 전화까지 받을 정도였고, 주택은행 내부에는 순간 비상이 걸렸다.

이 무렵. 김병주 합추위원장과 최범수 합추위 간사위원은 나머지 4명의 최고경영자 선정위원들에게 ‘오후 3시 하이얏트 호텔 XXX호실’집결을 통보했다. “합병은행장이 선정될 때까지 합숙을 계속한다”는 특명과 함께. 합병은행장 선정을 위한 ‘최후의 회의’ 였다.

회의 진행자는 김병주 합추위원장. 김 위원장은 각 위원들의 의견을 난상토론 식으로 개진토록 한 뒤 지지하는 후보를 물어보는 방식을 1~2시간 간격으로 반복했다. 만장일치가 될 때까지 교황선출 식으로 계속한다는 방침이었다.

하지만 김 위원장과 최 간사위원을 제외한 나머지 4명의 지지 결과는 2대 2. 두 은행 사외이사들이 각각 자신이 속한 은행장을 지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골드만삭스(국민)와 ING(주택) 두 외국인 대주주 역시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꿈쩍하지 않다.

균형을 이루던 저울추가 한 쪽으로 약간 기울기 시작한 것은 오후 9시께. 지리한 ‘2대2 싸움’ 이 장기화하자 최 간사위원이 깊숙이 숨겨놓았던 ‘캐스팅 보트’를 행사하고 나선 것. 최 간사위원이 ‘김정태 행장 지지’를 선언하면서 2대 2의 균형은 3대 2로 돌변했다.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측에도 이 같은 분위기는 두 은행 사외이사를 통해 곧바로 전달됐다. “오후10시께 상황이 반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다. 승리를 예감하고 있던 상황에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국민은행 고위 관계자) “장담은 할 수 없었지만 상황이 유리하게 변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주택은행 고위 관계자)

시장반응 긍정적, 두 은행 주가 상승

26일 새벽1시께 중단됐던 회의는 오전8시께 다시 재개됐다. 그리고 바로 그 시각. 미국 뉴욕에서는 골드만삭스 이사진들이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최고경영자 선정위원회에 참석한 골드만삭스 민지홍 이사로부터 분위기를 전달 받은 직후였다.

두시간여 뒤인 오전 10시가 조금넘은 시간. 뉴욕으로부터 ‘메시지’를 전달받은 민 이사가 김상훈 행장 지지를 포기하고 김정태 행장 지지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사실상 게임은 종료됐다. “3대2로 몰리는 상황에서 끝까지 버텨봐야 승산이 없는 싸움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 김정태 행장의 대외신인도를 감안할 때 굳이 무리하게 김상훈 행장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골드만삭스 한 관계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은행측에서는 “골드만삭스도 국내 투자를 위해서는 정부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3대 2의 구도가 다시 4대 1의구도로 바뀐 순간, 유일하게 김상훈 행장을 지지한 국민은행 김지홍 사외이사도 대세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주 위원장은 24시간 내내 ‘중립’을 지키는데 성공, “합추위원장이 합병은행장 선출을 좌지우지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씻어냈다.

상황이 종료된 10여분 뒤인 오전 10시30분께. 김 위원장은 두 은행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승리와 패배 사실을 전하며 24시간의 숨가쁜 드라마를 마무리했다. “축하드립니다. 행장님이 합병은행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주택은행 김영일 부행장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행장님께 직접 전화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국민은행 김유환 상무에게)

드라마의 결론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상당히 긍정적. 김정태 행장이 합병은행장에 선출됐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 이날 두 은행 주가는 3~4%씩 뛰어오르며 ‘CEO 주가’를 다시 한번 실감케했다.

김 행장은 특히 합병은행장 선출 직후 특유의 순발력을 발휘하며 “앞으로 중장기적으로 예금금리를 4%대까지 떨어뜨리는 등 소매금융에서의 리딩뱅크 역할을 확실히 해 나가겠다”고 공언, 다른 시중은행들을 바짝 긴장시키는 등 ‘역시 김정태’라는 평을 받았다.

김상훈 행장에 이사회 의장직 제의

하지만 ‘김정태 호(號)’가 성공하기 위한 관건은 최대 난제인 조직 융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단지 통합은행장에 주택은행 인물이 선출됐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주택은행 임직원들은 마치 통합은행의 주도권을 쥔 양 환호성을 지르고, 국민은행 임직원들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이는 등 벌써부터 행장 선출 결과를 둘러싼 분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합병은행장 후보 발표장에는 두세 명의 국민은행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행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한 명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아 주택은행만의 잔치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를 의식한 듯 김정태 행장은 김유환 국민은행 상무를 합병은행의 수석이사로 추대하는 등 탈락진영의 동요 막기에 나섰다. 김상훈 행장에게는 공개적으로 이사회 의장 직을 수락해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융계에서는 이 같은 방식의 포장성 융화책 만으로는 조직 통합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난해말 합병 발표 이후부터 양 진영에서 난무했던 상호비방과 유언비어, 이 과정에서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감정의 앙금이 치유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게다가 김상훈 행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맡게 될경우 두 행장간 팽팽한 대립구도가 계속 이어지면서 양측의 파벌 형성이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인원과 점포정리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김정태 행장은 “당분간 두 은행 임원을 그대로 유지하고 인력 및 점포구조조정도 단기간에, 강제적으로 수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금융계에서는 합병은행이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상당수 인력 및 점포 감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는 분위기다.

한 시중은행장은 “현재의 인력과 점포수준을 그대로 끌고 간다면 과도한 비용 부담 때문에 합병 효과는 크게 반감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그렇다고 무리하게 구조조정을 추진할 경우 두 은행 임직원간 반목과 갈등까지 심화해 과거 합병 실패 사례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사진설명> 김정태 주택은행장이 합병은행장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환한 표정을 짓고 있다.

경제부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1/07/31 14:50


경제부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