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할머니 시인 이월순 여사

"시는 황혼에 발견한 내 인생의 출구"

4년전 어느날. 객지에 나가있던 이월순(64)씨의 막내 아들 철성씨는 작은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얼마전부터 어머니가 '이상해지셨다'는 내용이었다.

새벽에 시도때도 없이 깨어나 거실을 왔다갔다 하고 그러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뭔가를 열심히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한밤 내내 온 가족들이 그 자판 두들기는 소리를 듣는다는 얘기였다.

얼마 뒤 고향집을 찾은 철성씨 앞에 어머니는 수십편의 시(詩)를 내놓았다. 다섯명의 자식에게 조차 한번도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없던 당신의 인생이야기가 총총 박힌 자작시였다. 1997년 그해, 이씨는 자신의 시집을 발표하며 시인이 되었다.

그것은 그녀 삶의 새로운 서막이었다.

글쓰기가 점점 더 가열됐다. 얼마 뒤 수필집을 낸 데 이어 1999년 뇌경색으로 왼쪽 팔다리가 마비된 뒤에도 그나마 성한 오른쪽 손 하나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렸다. 그건 글이 아니라 기록이었다. 한 평생 순종하고 인내하며 살아온 한 한국의 여인네가 발견한 황혼의 출구였다.

"어떨땐 하루에 서너편씩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한밤중에도 생각만 떠올랐다하면 그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글을 쓰면서부터 제 평생 가슴속에 쌓여있던 응어리가 하나둘씩 풀려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3~4년동안 그렇게 정신없이 글을 쏟고나자 이제야 뭔가 마음속이 후련하게 씻겨 나간 것처럼 평화롭습니다. "

“그의 글은 애잔함 담긴 한풀이 춤사위 같아”

1997년 시집 '풀부채 향기'를 낸 뒤 병마와 싸우던 중인 2000년엔 수필로 '세기문학' 신인문학상까지 수상한 충북 진천의 이월순씨. 같은 해 '내 손톱에 봉숭아 물'이라는 두 번째 시집을 선보였고 이듬해인 올해엔 월간 '문학세계'의 동시부문 신인문학상도 수상, 출발은 늦었지만 이력은 다채롭다.

그녀의 글들은 별로 요란한 것도 없다. 아름다운 치장 대신 소박하면서도 어쩐지 가슴 아릿한 무엇이 배어나오는 글들, 누군가는 '한풀이 춤사위처럼 애잔하다'고도 했다.

왜 그녀는 그런 글을 썼을까. 그녀는 평생 목사의 아내였다. 신앙에 몸바친 남편 옆에서 차마 누구에게도 함부로 속을 털어놓을 수 없는 조심스러운 삶 속에서 살아왔다. 행여 누가 될세라 마음놓고 이야기 나눌 친구나 이웃하나 사귀지 못했다.

어려선 그녀도 부모님의 귀여움을 받던 막내딸이었다. 농부였던 친정아버지는 아들을 얻기위해 소실을 따로 얻으시면서부터 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언니가 일찍 출가하고 나자 친정어머니는 둘째딸인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친채 의지했다. 그 어머니를 모시며 평생 독신으로 살려던 이씨의 꿈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결혼으로 무너졌다.

"상대의 얼굴도 한번 못 보고 결혼했어요. 저도 모르는 사이 어머니 혼자 사윗감 선을 보러 가셨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제가 1년전 꾸었던 꿈얘기가 떠오르더라며 어머니 혼자 이미 결혼 결정을 내리고 돌아오셨더라구요.

그 꿈이란 건 그 선을 보기 1년전쯤 제가 꿈속에서 아침 햇살이 환하게 비치는 어떤 1자집에 들어갔는데 '이게 우리가 살 집이다'하는 얘기가 들리면서 잠을 깬 일이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가 만나러 간 제 신랑이자기가 직접 지었다는 집을 보여주자 어머니는 갑자기 그 꿈이 하나님의 암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더라는 거죠.

어머니도 독실한 기독교인이셨고, 처음엔 시집가지 않겠다고 거부도 했지만 어머니가 워낙 완강하셔서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 결혼은 실패라는 생각에 말할 수 없이 절망하기도 했죠."

신랑은 충청도 양반 집에서 자란 모범생. 그러나 서로 자란 환경과 성격이 달라 신혼부터 편안치 않았다.

특히나 '열아들 부럽지않은 딸'로 자유로이 키우신 친정부모님과는 달리 전형적인 가부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 남편앞에서 숱하게 충돌했다.

여자라는 이름하에 억눌리고 무시당하는 서러움이었다. 충북 보은중학교를 졸업, 그 활기차고 발랄했던 소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결혼 자체가 실패였다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기 시작했다. 마냥 우울했던 결혼생활, 3남2녀를 낳고 기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점점 안으로 시들어갔다.

결혼 얼마 뒤 남편은 신학대학교와 대학원을 거쳐 목사가 되었고, 그녀의 세계는 점점 더 좁아졌다. 말많은 세상에 행여 불필요한 빌미를 줄 세라 이웃한 사람조차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다. 부부간의 충돌을 피하려다보니 아예 말수가 줄어들었고, 점점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마음의 병 치유 위해 펜 잡아

때로는 고통 끝에 이혼 얘기를 꺼내기도 수차례였지만 남편에겐 절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조금씩 평화가 생겨난 것은 아예 남편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버리고 난 다음부터였다. 남편이 언제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궁금해하지 말기, 그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기. 함께 살면서도 늘 남처럼 덤덤했다.

삭막하긴 했지만 그녀 나름의 최선의 대안이었다. 공허감을 이기려 이리저리 취미생활도 쫓아다녀 보았다. 지점토, 꽃꽂이, 현대자수, 종이공예 등 눈이 가는 것들마다 배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하나둘씩 곁을 떠나가는 자식들을 보면서 불안감만 더욱 커졌다. 오래지 않아 또다시 홀로 남으리라는 두려움, 외로움과의 싸움이었다.

40대의 고개는 더욱 넘기 힘들었다.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고 싶을만큼 우울증이 깊어졌지만 그 좁은 도시안에서 행여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봐 그마저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많은 고민 끝에 '신학교에 다니며 다시 공부하고 싶다'는 소리를 꺼냈지만 남편은 한마디로 잘라 반대했다. 마음의 문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나마 신앙의 힘으로 자신을 지탱했다. 마음의 병은 밖으로도 이런저런 질병들을 몰고왔다. 30대 후반부터 약을 복용해야했던 고혈압에다 골다공증 등 몸 곳곳이 아팠다. 그 무렵의 자화상을 담은 시 한편, 제목조차 거칠게도'허무'라는 이름 그대로 달아놓았다.

[오늘도 밥하고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이도 학교 가고/ 아이들도 학교 가고/ 내일도 또한 그런 것들/ 지치고 쇠약한 몸과 마음/ 나의 기쁨은 어디에/ 나의 행복은 어디에/ 손은 부지런히 빨래를 비비는데/ 텅-빈 허전한 가슴은 눈물 공장인가...]

일과 결혼으로 자식들이 거의 떠나간 뒤 미혼의 딸 하나만 남겨둔 1996년 어느날 진천우체국에서 컴퓨터 무료 강좌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에서 난생 처음 워드 프로세서를 배웠다. 그것을 배우고 싶었던 이유는 두가지였다.

더 나이가 들어 외출도 어려워지면 더더욱 사람들과 단절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 그리고 세상을 뜨기전 한번쯤은 자식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라도 적어 전해주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환갑의 컴퓨터 학습은 쉽지 않았다. 그나마 중학교까지 마친터라 다른 노인들에 비해 영어를 이해하기는 비교적 쉬웠지만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기엔 여전히 힘겨운 나이였다. 하루 2시간씩 수업을 받고도 그날치를 다 소화하지 못해 귀가후에도 부지런히 복습하고 공부했다.

한달짜리 무료강좌가 끝나던 바로 그날 저녁, 우체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처음으로 자신의 시를 쓴 것이었다. 제목은 '까치의 뉴스'. 좋은 소식만 물어다준다는 까치처럼 자신은 컴퓨터에서 까치 둥지를 보았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시로 풀어낸 살아온 이야기들

정신없이 글을 썼다. 미사여구의 감상적인 시가 아니라 살아온 얘기를 시로풀기 시작했다. 닫혔던 말문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컴퓨터 앞에서 서성대거나 글을 썼다. 1년이 채 지나지않아 백여편의 시가 쌓였다. 그것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자 비로소 그들에게도 어머니의 삶이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특히 시각연극학을 전공한 예술가 기질의 막내아들 철성씨는 어머니의 글이 시집으로 발표되는데 가장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직접 편집과 교정 등을 보아가며 어머니의 시집을 세상에 내놓은 뒤, 몇 달 후 그 자신도 현대시로 등단한 시인 아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2년전 어느날 평소처럼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갑자기 술 취한 사람처럼 제 다리가 갈짓자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전부터 골다공증이 있어 그렇게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치겠다 싶어 더 이상 가지않고 길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지나가던 분이 보시고 저를 병원에 데려다줬어요. 곧바로 큰 병원으로 이송됐는데,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 동안 이미 왼쪽팔, 다리가 마비돼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입원해있는 동안 무척 많이 울었습니다. 제 몸보다도 아직도 결혼시키지 못한 막내딸이 자꾸만 마음에 걸려 눈물이 자꾸 흐르는겁니다. 처음엔 아주 절망했다가 의사선생님이나 주윗분들의 위로로 희망을 갖고 나자 실제로 상태가 빨리 호전됐습니다. 같은 증세로 병원에 입원해있던 환자들중에서도 가장 회복이 빠르다며 의사선생님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간절한 기도의 힘 덕분이었지요."

입원 1달후, 난간을 붙들고 겨우 일어설 수 있을 때쯤 퇴원했다. 집에 돌아온 뒤 맹렬한 글쓰기는 다시 이어졌다. 왼쪽 손을 쓸 수 없어 오른손 하나로 띄엄띄엄 자판을 두들겼다.

진천우체국에서 인터넷 무료강좌가 열리자 그 편치않은 몸으로 또 찾아갔다. 수강을 원했지만 우체국에선 이미 신청자가 꽉 차 더 이상 자리가 없다고 했다. '그래도 가끔 결석하는 사람이라도 있을테니 그런 자리라도 임시로 앉아 배울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실제로 매번마다 결석자들이 한둘씩 생겼고, 날마다 빈자리를 찾아다니며 인터넷을 배웠다. 강사조차 '그 연세에다 그 불편한 몸으로 대단한 열성'이라며 혀를 둘렀다.

회복에 대한 굳건한 믿음, 거동에 불편 못느껴

시든, 수필이든, 동시든 쓰고 싶은대로 썼다. 여러곳에서 상을 받으며 남다른 주목을 받기도 했고, 한편에선 그녀의 글로 위로를 얻는 또다른 독자들까지 생겨났다. 그사이 병세도 많이 좋아졌다.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끈질긴 믿음끝에 이젠 웬만한 일상생활엔 지장이 없을 만큼 왼쪽 팔 다리의 근력이 돌아와있다.

"지나고보니 지난 힘들었던 세월이나 남편에 대해서도 이젠 감사한 마음이 생겨요. 제겐 힘든 사람이었지만 만약 자상하고 인정많은 남자였다면 절대 지금처럼 목사님으로서 큰 일을 다하지 못했을 거거든요. 고통의 보람은 있었구나 싶어요.

옛날의 저처럼 갈등을 겪는 젊은 부부들이 있다면 어떻게든 잘 참고 견뎌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처음엔 힘들겠지만 평생 그렇게만 사는 것도 아니고, 살다보면 서로가 닮는 것도 있어요. 아마 한참 세월이 흐르다보면 분명 둘 사이의 중간점이 새로 만들어져 있을거예요. 분명히 인내한 보람이 있었다고 말 할 날이 올거예요. "

방금 청소를 끝낸 사람처럼 맑고 편안한 표정으로 선 늦깎이 시인, 그녀의 집 주변 작은 텃밭에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가꿔온 봉숭아가 만개해 있었다.

입력시간 2001/07/31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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