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욕하면서 배우는’ 못난 우리 영화인들

얼마전 영화진흥위원회 배급개선소위원회에서 보낸 한 통의 이메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주말 흥행성적을 집계해온 총무인 김선호씨의 위원회 탈퇴 소식이었다. 극장입장권 통합전산망이 아직 실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흥행성적, 통계를 알려주는 유일한 창구였다.

그러나 배급개선소위원회의 목적은 말 그대로 배급 개선을 위한 것이다. 김선호씨의 말을 빌면 흥행 성적집계는 그작은 봉사의 시작에 불과하다.

그런 작은 일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는 위원회까지 탈퇴했을까.

“흥행집계는 단순히 관객의 수만 헤아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미국 직배사들이 마음대로 횡포를 부리는 한국영화계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했다”는 것이다.

막말로 흥행성적 집계로 직배사들이 극장을 장악해 한국 수입업자나 제작사들의 작품이 상영되지 못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제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직배사가 아니었다. 7월 들어 국내 영화사들의 극장잡기 경쟁이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서울 216개 스크린에서 단 7편의 영화만 상영되는 극단적인 과점현상이 일어났다.

여름철 블록버스터, 한국영화가 막강한 배급력을 무기로 무리하게 극장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중소영화사가 수입한 작지만 재미있고 썩 잘만든 외화, 이를테면 ‘간장선생’ ‘오그레이스’같은 작품이 겨우 한 두 군데 극장만을 잡아 어렵게 개봉했고, 그나마 일주일을 버티지 못했다.

이런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타인의 취향’은 단 한 극장(광화문 사네큐브)에서 독야청청 선정하고 있으며, ‘브랜단앤 트루디’도 비슷한 처지다.

‘노랑머리2’는 일주일 만에 상영관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극장이 줄었다. 반면 굵직한 국내 배급사를 등에 업은 ‘엽기적인 그녀’는 서울에서 30여개가 넘는 극장을 편안히 잡았고, ‘신라의 달밤’은 흥행성적 탓도 있지만 편안하게 한달 동안 극장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 실망스러운 것은 국내배급사가 ‘끼워팔기’로 다른 국내배급사 외화의 스크린을 빼앗는 것이다. 그동안 직배사를 공격해온 나로서는 회원사(영화인회의)끼리, 나아가 동료끼리 서로 짓밟는 행태를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무력감을 느껴 탈퇴를 결심했다”고 김선호씨는 밝혔다.

그는 미국직배사의 횡포를 닮아가는 우리 영화계가 한없이 절망스럽고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했다. ‘툼 레이더’를 시네마서비스가 ‘엽기적인 그녀’를 무기로 ‘툼 레이더’를 밀어내고 ‘스파이 키드’를 무리하게 여러 극장에 개봉시켰다는 소문이다.

현재 국내 양대 메이저 배급사는 시네마서비스, CJ엔터테인먼트. 이들의 힘은 이제 직배사를 능가할 만큼 막강하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들이 앵무새처럼 되낸 말이 바로 “직배사 횡포를 막기 위해 우리의 배급력을 늘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우석이 서울극장과 손잡고 일찌감치 배급자로나선 것이나

CJ가 자체 극장 체인인 CGV를 서둘러 갖춘 것이나, 다 말은 “우리가만든 영화, 수입한 영화 마음 편하게 걸고, 그래서 한국영화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였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결국 자기 이익 극대화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여전히 중소제작사나 수입사는 발붙일 곳이 없다. 단지 횡포의 대상이 미국 직배사에서 국내배급사로 바뀌었을 뿐. 그게 더욱 그들을 절망하게 만든다.

마치 일제 식민지시대를 보듯.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다. 시어머니에 고된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되면 더 가혹하게 며느리를 닥달한다’는 말도 있다. 못난 인간들이다. 한국영화시장 점유율 40%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입력시간 2001/08/03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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