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위험한 다수결의 횡포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이다. 그러나 그 다수결은 정당한 절차와 과정, 그리고 정의와 양심을 전제로 한다. 그것을 무시할 때 다수결은 또 다른 독재이다.

다수결은 또 한 소수의 가치와 존재를 인정할 때 그 가치를 발한다. 100%의 완벽한 다수결인 만장일치 보다 51%의 다수결이 더 값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수로 소수를 무시할 때 제임스 브라이스는 “민주주의 종말”이라고 말했다.

목표나 결과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때론 절차가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아무리그 뜻이 높고 귀하더라도 그것이 부정한 방법을 통해 이뤄질 때 사회는 무질서와 부도덕에 빠진다.

‘모로 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말은 방법의 선택을 의미하는 것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개혁도 마찬가지다.

‘개혁’은 흔히 수단과 방법을 뛰어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혁이 정당한 과정을 무시할 때그 개혁은 성공할 수도 없으며 정의가 아니라 야합이 된다. 그래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7월 27일 서울 민사17부(전병식 부장판사)는 지난해 6월 조희문(상명대 영화과교수)씨가 영화진흥위원회를 상대로 낸 ‘부위원장 불신임 결의 무효확인 소송’에서 “피고(영진위)의 조씨에 대한 부위원장 불신임 결의는 무효”라고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원고가 겸직금지를 위반하고 부위원장으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해 업무파행을 가져왔다고 주장하나 겸직이 불신임 사유가 될만큼 중대한 과오는 아니고 업무파행이 임무를 게을리 한 탓이란 증거도 없다”고 했다.

겸직이란 그가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인데 문제가 될게 없으며, 업무파행의 원인은 출범 때부터 위원선정을 둘러싼 영화인들간의 갈등이었지 조씨의 개인적 책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영진위의 업무 파행은 이유야 어떻든 위원들의 치열한 자리다툼과 상대 배척에 있었다. 세번의 위원장 교체, 김지미, 윤일봉씨의 반발, 조희문씨의 부위원장직 선출에 따른 문성근씨의 사퇴 등 신구세대 어느 한쪽의 양보없는 갈등으로 영진위는 바람잘 날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5월 유길촌 위원장을 포함한 7명의위원이 들어왔다.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은 “우리가 선출한 부위원장이 아니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며 온갖 이유를 붙여 일방적으로 불신임을 결의해 조씨를 쫓아내는 대신 이용관씨를 부위원장에 앉혔다.

그들이 보기에는 보수세력인 조씨가 ‘개혁’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은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영화진흥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한국영화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시장점유율 40%에 육박할 만큼 이렇게 부흥하고 있는 것이 자신들의 의욕적인 진흥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속한 영화인회의는 심지어 이번 판결이 부당하기 때문에 “불신임 이유를 보완하여 법적으로 정당한 판결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맞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극영화지원금을 둘러싸고 논란이 된 ‘자기식구 챙기기’나 갑자기 풍성해진 영화진흥기금의 석연치 않은 집행 등 염불보다는 제삿밥에 눈이 멀었다는 의심도 피할 길 없다.

이런 모든 것들이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합리’와 ‘정의’가된다. 판결결과를 놓고 조씨는 말했다. “법이 절차의 정당성을 존중해줘 고맙다. 목표도 중요하지만 절차도 중요하다. 그 어떤 선도 정해진 규칙과 법을 지킬 때 가치가 있다”고 했다.

그가 부위위원장을 해야 하고, 그의 이념이나 정책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중요한것은 ‘상식’이다. 상식을 무시한 ‘개혁’의 이름으로 소수를 배척하지 말자. ‘편가르기’와 ‘적 아니면 동지’란 이분법이 우리사회 곳곳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나마 조씨의 판결로 아직 ‘법’만은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 다행스럽다.

입력시간 2001/08/0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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