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일본(72)] 니혼자루(日本猿)

일본 열도는 대략 북위 24~46도에 걸쳐 있다. 남북의 범위가 한반도의 2배가 넘다보니 생물 분포가 그만큼 다양하다.

주변의 넓은 바닷속은 물론이고 육상에도 사람의 발길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는 험준한 산악지대가 많다. 똑같이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었지만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생태계의 파괴가 덜했던 중요한 요인이다.

그 결과 우리 반달곰과 흡사한 '쓰키노와구마'(月の輪熊)는 가을이면 산촌의 감나무에 몇 마리씩 한꺼번에 매달려감을 따고, 수시로 민가에 침입해 먹을 것을 훔쳐 갈 정도로 흔하다. 야생 사슴도 개체수가 너무 늘어 삼림 피해를 막기 위해 정기적으로 수천마리를 사살해야 할 형편이다.

가장 흔한 것은 일본에만 자연 서식하는 원숭이인 '니혼자루'(日本猿)이다. 오키나와(沖繩)와 홋카이도(北海道)를 제외한 일본 전역에 분포하고 우리가 흔히 원숭이의 대표적 특징으로 오해하는 붉은 엉덩이를 갖고 있다.

'원숭이 똥구멍은 빨개'라는 말잇기 노래에도 등장하듯 우리에게도 가장 익숙한 원숭이이다.

담갈색, 또는 암회색 털이 팔다리와 등을 덮고 있으나 복부는 흰털로 덮여 있다. 밝은 살색이나 적갈색의 얼굴은 가을에서 겨울에 걸친 교미기의 약 4개월간 빨갛게 바뀌어 흔히 얼굴과 엉덩이가 붉은 원숭이로 알려져 있다. 오랜 세월 일본 열도에서 인간과 공존해왔으며 설화에 흔히 등장하는 등 친근하고 낯익은 존재로 통해 왔다.

니혼자루는 북한(北限)의 원숭이다. 고릴라나 침팬지 등 인간을 제외한 대개의 영장류들이 모두 따뜻한 지역을 서식지로 삼고 있는 반면 니혼자루는 인간 못지않는 적응력으로 추위를 극복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나가노(長野)·군마(群馬)현의 산악지대는 물론 겨울이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아오모리(靑森)현 시모키타(下北)반도에도 서식한다. 장기간에 걸쳐 규슈(九州)에서 북쪽으로 서식지를 넓혀 오면서 자연 조건에 적응한 결과이다.

아득한 과거의 버릇이 남아 과일과 씨앗, 새순과 꽃을 즐겨 먹지만 눈덮인 고산 지대에서는 나뭇껍질까지 닥치는대로 벗겨 먹으며 겨울을 난다. 버섯이나 곤충, 개구리, 도마뱀 등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 연한 진흙을 먹어 무기물을 보충하기도 한다.

인간 진화사의 한 대목을 연상시키는 니혼자루의 뛰어난 환경 적응 능력은 일찌감치 영장류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56년 일본 인류학회 정례 심포지엄에서 이마니시 긴지(今西錦司: 1902~1992년) 교수가 이끈 교토(京都)대학 영장류연구소 연구팀은 미야자키(宮崎)현고지마(幸島)의 원숭이 무리의 '이모아리이'(苧洗い), 즉 감자씻기 행동을 보고해 세계적인 화제를 불렀다.

고지마의 니혼자루 무리는 바닷가 바위에 붙은 해초류를 뜯어 먹거나 물고기를 잡아 먹는 등의 독특한 행태로 연구자들의 눈길을 끌어 왔다.

어느날 이들 무리에 암컷의 '천재 원숭이'가 태어났다. 무리의 다른 구성원들이 흙이 묻은 감자나 고구마를 그냥 먹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천재'는 우연히 물에 씻어 먹는 법을 발견한 이후 흙이 묻은 먹이는 반드시 씻어 먹었다. 형제와 부모가 이를 흉내내면서 감자씻기 행동은 이내 무리 전체로 번졌다.

앞서 작은 나뭇가지나 지푸라기를 개미집에 쑤셔 넣었다가 빼 거기에 붙은 개미를 먹는 침팬지의 행동 등이 확인되면서'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는 인간의 독점적 지위는 깨졌다.

고지마 니혼자루의 '이모아라이'는 문화·전통조차 인간 사회 고유의 현상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시켰다.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인자인 '진'(Gene)과 비교되는 문화·전통 계승의 모방인자인 '밈'(Meme)의 개념이 정착하는 데도'이모아라이'가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일본의 영장류 연구는 2차대전 이후 세계 영장류 연구, 특히 동물사회학적 연구를 선도했다. 무리의 구성원에 하나 하나 이름을 붙여 개체별 사회적 행동 변화를 장기적으로 관찰하는 기법은 오늘날 영장류는 물론 다른 동물사회학에서도 기본 기법으로 정착했다.

그것이 수십 마리씩 모계 사회를 이루는 니혼자루 연구에서 비롯했으며 연구 대상이 널려 있다는 점에서 일본 학계는 커다란 축복을 받은 셈이다.

반면 200마리 정도였던 시모키타반도의 니혼자루가 최근 1,000여 마리로 늘어 농작물 피해가 심각한데도 천연기념물이어서 전기철조망 부설 등이 고작인 현실은 농민들에게는 고통스럽다.

그래도 온천욕을 즐기는 원숭이가 나가노·군마현 온천지의 새로운 관광명물로 등장했듯 니혼자루에 대한 일본인들의 사랑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입력시간 2001/08/22 20:34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