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금융현장의 부패고발서 펴낸 조덕중씨

"못먹는 사람이 바보가 돼선 안돼죠"

질문을 바꿨다. 왜 책을 썼는가는 충분히 짐작 가능한 일이었다. 책을 읽은뒤 '그러는 당신은 깨끗하냐'고 공격한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저도 개인적으론 약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작은 잘못을 미끼로 큰 잘못이 이뤄져서는 안되고, 지금 네 잘못이냐 내 잘못이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많이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빛을 보는 세상이 되어선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다행히도 제 자신 업무적으로는 지난 10년 금융인으로 지내오면서 단 하나도 약점이 없습니다."

욕을 먹기를 각오하고 쓴 책이지만, 오히려 비난을 예상했던 곳에서 그는 요즘 격려를 받고 있다. '우리도 못하는 얘기를 차라리 시원하게 잘 꺼냈다'는 내용들이다.

물론 비공식적인 격려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런 전화들로 잠깐씩 대화가 끊겼다. 돈벌이용으론 애초에 기대하지 않은 책, 관련기관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황송할만큼 친절이 몸에 밴 그의 얼굴이 새삼 환하다.

하나은행 서초지점장 조덕중(49). '돈이 안 돌면 사람이 돌아버린다'는 책을 냈다. 그럴듯한 경제이론도, 통계자료도 들먹이지 않은, 살아있는 금융현장의 부패 고발서다. 자신이 겪고 보고 들은 이야기만 확실히 담았다. 그래서 더 따끔하고 화가 난다.

조씨는 1970년 한국은행에 입사해 은행감독원 검사국, 검사통할국을 거쳐1991년 하나은행으로 옮겨 일해왔다.

금융계에 몸담은지 31년째, 한때는 검사역으로, 10년전부터는 지점장으로서 부패의 안과 밖을 다 보았다. 아는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아서 입을 다물고, 모르는 사람들은 몰라서 그저 양심만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공공연한 부패의 현장을 낱낱이 드러냈다.

글의 투가 그의 자조적인 심정을 그대로 나타낸다. 독백투의 끊임없는 자문자답과 반어법이 곳곳에서 빛난다. 참으로 쓰라린 유머다.


부패의 안과 밖을 모두 본 금융계 31년

내용중 일부만 옮겨본다. 은행감독원 근무시절, 부정행위를 조사하는게 주업무였다. 그중 오리축사에 시멘트 벽돌 몇장 사진을 찍어놓고 시설자금이라하여 400여억원을 대출받은 곳 이 있었다.

사업규모에 비해 대출액수가 워낙 과다해 이내 의심을 샀다. 대출금이 실제 사용처와 부정행위 여부를 조사하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대출받은 수표가 들어간 단자회사와 종금사 등을 쫓아다니며 힘겨운 자금추적을 벌였다.

강력반 형사를 방불케하는 치밀한 뒷조사와 심리전, 증거확보 끝에 내막을 캐고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빚을 낸 돈으로 자본도 늘리고 땅도 사고 '나눠 먹기'도 하는 등, 화려한 돈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어려운 문제를 해결했다며 칭찬해줄 줄 알았던 상사는 뜻밖에도 그사이 태도가 바뀌어있었다.

'동료들을 생각하라..'는 냉담한 반응과 함께 심지어 '대출후 사용처 관리감독에 소홀했던 기관의 책임이 크다. 처벌보다 제도 개선이 중요하다'며 본질까지 뒤섞어 놓았다.

조사 초반부만해도 '은행감독원의 체면이 걸려있다'며 누구보다 성화를 하던 장본인이었다. 조사가 진행되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에겐 수수께끼였다. 최종처리결과, 부정행위의 관련자들은 경고 정도로 무사히 처벌을 피해갔고, 심지어 줄줄이 승진하는 경사까지 있었다.

내부에서도 '죄가 밉지 사람이 밉냐'며 처벌 대신 제도개선을 앞세우던 분 또한 승승장구였다. 난제를 해결한 검사자 조씨에게도 '댓가'는 있었다. 갑자기 먼 곳으로 전출명령이 떨어졌다.'그곳엔 당신같은 사람이 가야한다'는 이상한 찬사와 함께.

1991년엔 부정대출을 방지할 방법을 만들어 교육하라는 원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그 방안을 서류로 작성해 제출하면서 '하위직의 부정보다는 높은 사람의 부정을 중점적으로 단속한다'는 내용을 덧붙였더니 얼마뒤 내려온 서류엔 '높은 사람의 부정'부분이 삭제돼 있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것을 삭제했던 어른은 얼마뒤 '많이 드신' 죄목으로 교도소 신세를 졌다. 물론 그것도 잠시. 금새 풀려나왔다. '높은 분들은 교정, 교화도 빨리 받는 듯 했다'.

1995년 무등, 덕산건설의 연이은 부도로 광주의 지역경제가 쑥대밭이 됐다. 협력업체까지 공사대금을 못 받아 연달아 쓰러지고 이 회사에 대출을 해 준 금융회사에 예금주가 몰려드는 등 지역전체가 아우성이었다.

부도난 회사에선 법정관리를 신청했고 채권 금융회사 27곳중 26곳이 동의하는 가운데 유독 혼자서 도장을 찍지않아 온갖 원성을 들었다.

반대한 이유는 돈의 메커니즘 때문이었다. 법정관리는 특히 신중해야 한다는 것. 당장은 환상적인 묘수처럼 보여도 그에 따른 은행의 수익감소, 대출 위축은 타기업의 연쇄붕괴까지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부도를 낸 기업인은 감옥안에서도 모종의 '리스트'로 여러 사람을 떨게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출소했다. 한편에선 그가 교도소 안에서 던진 큰소리 한마디에 한 은행장이 맥없이 자리를 물러났다는 얘기도 들렸다.

조씨가 주장하는 진짜 구조조정의 대상은 그런 것들이다. IMF때 대마불사의 신화가 무너진 것도 궁극적으로는 대출해 준 돈을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출받지 못할 돈을 빌려준 것부터가 잘못이었고, 그런 비상식적인 대출이 가능했던 것은 '중간에서 드시는 분들'의 부패 때문이다. 결국 그 피해는 국민이 떠안았다. 빚더미의 기업을 무리하게 끌어안느라 약 150조원의 공적자금이 허무하게 날아간데 대해 조씨는 아직도 속이 끓는다.

"진념 장관이 공적자금 40조원을 다시 더 넣겠다고 했을땐 너무도 열 받았습니다. 가장 답답한건 그런데도 왜 다들 조용하냐는 겁니다. 옛날에 109조원으로 끝내겠다, 더 이상은 없다고 했는데, 하긴 공적자금은 공동의 돈이라 당장의 내 손해가 없어서 그런건지, 그 약속마저 깨고 또 공적자금을 넣겠다는데도 모두들 아무 말이 없는 겁니다.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저는 제 고객의 신용카드사고로 단돈 200만원만 문제가 생겨도 심지어 7,8년전 것까지 책임을 물어 회사에서 어김없이 제 월급에서 떼어갑니다. 40조원이면 40만원의 만배입니다.

그런데도 뭐라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누구 하나 아직까지 제대로 책임을 진 사람도없습니다. 분통은 터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나마 떠오른게 이 책 뿐이었습니다. "


물쓰듯 쓰는 공적자금에 분통

조씨는 평범한 금융인중 한사람이다. 그저 자기 맡은 바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업무적인 보고서외엔 별다른 글이란 것도 써 본 적이 없다.

광주서중을 졸업, 집안 형편이 기울면서 광주상고에 진학,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19살때 한국은행에 입사해 가족을 부양했다.

직장생활중 국제대 야간대 경제학과에 다녔고, 해군복무후 직장에 복귀한 몇년뒤엔 당시 한국은행 소속이었던 은행감독원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만 약 9년. 워낙 많은 부패현장을 조사하다보니 돈에 얽힌 비리, 사기수법, 비뚤어진 의리 등 음지를 다 보았다. 사기행각 자체가 워낙 고도의 속이는 기술이다 보니 똑같은 트릭으로 대응해 단서를 찾아내는 기술도 생겼다.

이런 사례도 있다. 1988년 한 신용협동조합을 검사할때 처음엔 건네받은 서류를 검토한 결과 총자산이 약 2억원 규모, 현금을 맞춰보니 약 27만원의 오차만 있어 가볍게 처리하고 지나가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출납여직원이 지나칠만큼 서럽게 울었다. 그 과장연기에 오히려 의심이 들어 아예 예금원장을 들고 다시 합산해보자 실제 잔액이 무려 30억원이 넘었다. 이중장부로 속인 것이다.

다 파헤치고보니 이름만 조합이라고 걸었을뿐 조합원들의 예탁금으로 부동산도 사고, 영화사도 차리는 등 사용처가 현란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경비지출 메모장의 기록이 말해주었다. 관청, 은행, 정치인 등에 돈을 쓰며 거미줄처럼 빽빽히 힘을 엮어두고 있었다.

부패의 고리를 절묘하게 이용하는 메뚜기 사기떼도 있다. 엄청난 생존력을 과시하는 금융파괴의 주범이다.

1988년 광주시에서만 어음사기단 조직 38명이 구속됐다. 광주와 전남북 15개 금융회사, 63개 점포에서 총120개 계좌가 이들에게 이용당했다. 어음사기단은 처음부터 부도를 낼 목적으로 은행에 접근한다.

은행직원에게 밥과 술을 사주며 친분을 튼 뒤 서서히 코를 꿴다. 있지도 않은 유령업체의 대표나 재산가 흉내를 내면서 위장 사업체의 명의로 약속어음이나 당좌수표 용지를 은행에서 1,200장씩 빼낸다.

그 어음으로 상품이나 수퍼마켓 등을 닥치는대로 산 뒤 헐값에 처분하고는 부도를 낸다. 가장 전형적인 수법이다. 좀처럼 뿌리가 뽑히지도 않는다. 더욱 아찔한 것은 현재 코스닥까지 이런 어음사기단이 대거 진출해 있다는 것이다.

조씨 눈에 뻔히 보인다. 하지만 그런 작자들일수록 권력층과 탄탄히 연계해 그들만의 작전세력을 구축해 놓았다. 보이지않는 뒷거래가 사기단을 끈질기게 먹여살린다.


영업사원처럼 산 지점장 10년

상대적인 학력 콤플렉스 때문에라도 그는 더 열심히 일했다. 실제로도 실력을 인정받는 검사역중 하나였다.

그러나 말단 검사역이 가진 한계 등, 회의를 느끼던 무렵 하나은행(당시엔 한국투자금융) 창립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이전과는 또다른 악전고투가 시작되었다. 갓 창립된 은행이다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개척해야 할 일들 뿐이었다. 지점장이라기보단 맹렬 영업사원처럼 살았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한 모습이다.

초창기 원당 지점에서 근무할땐 아예 한달씩 여관신세를 지며 일하기도 했다. 농사짓는 주민들을 만나자면 이른 새벽이나 저녁시간을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함께 상추도 따주고, 이미 먹은 저녁밥을 세차례나 연거푸 먹으면서 주민들을 만나기도 했다.

서울 봉천동 지점에선 매일같이 약 70명의 사람을 만나며 살았다. 예약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대 거리를 훑으며 무차별로 찾아들어가 고객을 유치했다. 거의 전투처럼 살았다. 덕분에 사내에선신화적인 기록도 몇몇 세웠다.

특히 해군에서부터 시작된 '사고처리반'의 운명은 검사역때나 현재의 은행에서도 여전, 금융사고가 터질 때마다 단골로 파견됐고 여지없이 해결하고 돌아왔다. 그가 떳떳한 것은 언제나 정직하게 뛰었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택시를 탔다가 택시기사와 싸울 뻔 했다. 이런저런 얘기끝에 '10년 지점장을 해도 변한게 하나도 없다'고 했더니 대뜸 택시기사는 '남들 다 해먹는데 혼자 못 해먹었으면 그 사람이 바보 아니냐'고 했다.

자칫 싸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내려버렸다. 과연 '먹는' 것이 정상이고 먹지 않는 자신이 비정상인가.

그가 갑자기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도 어쩌면 그것을 재차 묻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모른다. 대책만 있고 원인은 없는 나라. 그 때문에 온 나라경제가 거덜나고도 여전히 '관행'이란 이름 아래 부패가 횡행하는 나라. 그가 바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을 지키게 해달라는 것이다.

일단 할 말은 다 했으니 속은 후련하다는 조씨. 그러나 완전히 개운한 결말은 아니다. 그 스스로 저지른 이번 '사고'는 과연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폭로'와 '고발'에 격려의 박수만 치고 있을것인가.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8/23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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