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현의 길따라 멋따라] 서산 해미읍성

고즈넉한 석성에 내려앉은 역사의 흔적

잠깐 들르는 여행지가 있다. 원래의 목적지는 아니지만 이정표에 유혹돼, 혹은 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잠깐 옆길로 빠진다. 당연히 큰 기대는 걸지 않는다.

그러나 뜻 밖에도 만족스러운 경우가 있다. 잠시 짬을 냈던것인데 그 곳의 분위기에 푹 빠져 바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미읍성(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이 바로 그런 곳이다. 장이 서고 각종 음식냄새가요란한 관광용 민속마을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보존의 정신과 노력이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정갈한 유적이다.

해미읍성의 역사는 약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천수만의 해산물과 너른들판 덕분에 이 곳은 예로부터 풍요로웠다. 부유함을 약탈하려는 왜구의 침탈도 끊이지 않았다.

해미는 서해안 천수만으로 흘러드는 도당천 상류에 위치한 마을. 서해안의 땅은 물론 바다를 다스리기에도 제격인 곳이다. 그래서 조선 태종 때인 1407년 토성을 쌓았다.

그 후 성종 때인 1491년 토성을 허물고 돌로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높이가 약 4㎙ 쯤 되는 성곽을 약 2㎞ 둘러쳤고 동, 서, 남쪽에 문을 한 개씩 달았다. 높은 곳에는 서해로 들어오는 왜구를 감시할 수 있는 정자도 세웠다.

성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남문인 진남문만 남고 성 안의 건물들은 행정관서나 학교등의 용도로 쓰였다. 왜구를 감시하던 정자 자리에는 일본이 신사를 세웠다.

그러나 1960년 나라에서 사적 제119호로 지정하고 1973녀부터 복원작업이 시작되면서 해미읍성은 제모습을 되찾았다. 행정관서와 120여 민가는 모두 성 밖으로 옮겨졌고 옛 건물들이 고증을 거치며 다시 자리를 잡았다.

현재 해미읍성에는 정문인 진남루와 동문, 서문 등 2개의 포문이 있고 성 안에는 동헌과 아문이 남아있다.

우선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점에서 감탄이 나온다. 성을 둘러서 빼곡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덩굴식물은 처음 석성이 세워질 때부터 있던 것이다. 진남루는 물론 동헌과 아헌도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요란한 단청을 입혀 ‘복원했다’라고 티를 내는 다른 유적지와는 다르다. 성 안은 유물 발굴 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잔디밭이다. 일손이 모자라는지 잔디 만큼이나 잡초가 우거진 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다.

그러나 성안의 그 푸르름으로 인해 진남루 아래의 문으로 들어서면 마치 거대한 정원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해미읍성은 또한 종교와 관련해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박해의 정점에 해미읍성이 있다.

특히 1866년의 병인박해에서는 1,000명이 넘는 신자가 이 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머리채를 묶어 감옥밖의 호야나무에 매달거나, 성 밖의 큰 돌에 올려놓고 몽둥이로 마구 때려 목숨을 빼앗았다.

그 호야나무는 아직 푸른 잎을 피우고 있는데 천주교 순교목으로 지정돼 있다. 당시 순교한 신자들의 유해는 1975년 이규남 신부에 의해 읍성에서 1㎞ 쯤 떨어진 순교기념탑에 안치됐다.

해미읍성의 또 하나의 매력은 무료라는 점이다. 주말과 휴일에는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대부분 방문하지만 평일에는 해미 주민들의 차지이다. 나무그늘에 앉아, 진남루의 누대에 모여 더위를 식힌다. 의미있는 사적이자 편안한 쉼터이다. 외지인들이 그들을 바라보는 눈에는 부러움이 담겨있다.

권오현 문화과학부차장

입력시간 2001/08/2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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