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의례] 현대사의 시련과 맥을 같이 한 삶

페스티벌 집행위원장 임진택씨

지난해 여름 남산골 한옥 마을앞 지하실에 4평짜리 지하실을 임대, ‘세계 통과의례 페스티벌 2000’ 준비에 분주하던 때와 비긴다면 지금은 별장이나 다름없다. 임진택(51)씨는 올해도 행사 집행위원장이다.

지금은 경복궁 민속박물관 전시과중 20평 공간이 그의 사무실이다. 사단법인 한국민속박물관회(회장 이수성) 학예연구원 양종승 박사와의 친분과 이해 덕택이 크다.

무엇보다, 이번 행사는 현대사의 질곡 때문에 에둘러 와야 했던 어떤 사람에 대한 사회적 승인이다.

불의에 항의하는 투사로, 판소리 가객으로, 극단 대표로, 그가 보여 온 모습은 다양했다. 별난 이력은 그가 유별나게 겪어 온 삶의 통과의례 때문이다.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69학번)에 입학하기 전. 고등학교까지 그는 공부만 알던 ‘범생’이었다.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는 그러나 자유와 낭만, 진리에 대한 열정등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1학년 2학기 연극반에 가입한 그는 3학년때 서울대 첫 탈춤반의 흐드러진 봉산탈춤 공연을 보고, 진정한 신명의 세계와 조우한다.


탈춤을 공연장으로 끌어낸 사람

그것은 연극과 사회적 발언의 접점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이후 그 화두를 놓아 본 적 없는 그에게는 ‘탈춤을 우리 시대의 마당, 즉 공연장으로 끌어 낸 첫 사람’이라는 평가가 따른다.

그에 의해 탈춤은 전통 보존 민속놀이 마당이 아니라, 동시대의 공연 양식으로 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당신은 과연 어떤 통과의례를 치러냈나?

“제 자신의 통과의례요?” 거기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다며 한참뜸을 들이던 그는 6개의 계기점을 집어 낸다. 그것은 우리 현대사의 시련이기도 하다.

먼저, 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철창 신세를 졌던 때. 실제적 가장이었던 누나가 시집간 뒤, 자신이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두번째, 학교측의 주선으로 입사한 대한항공에서 제주도 발령을 받고 발끈, ‘현대판 유배’라며 사표를 내고 뛰쳐 나왔던 시기. 반유신 활동을 계속하던 사실이 드러나 제주도 발령을 받은 것.

“어머니는 모셔야지,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 기억조차 안 나요.”

친척뻘이 되는 TBC 사장 김덕보씨가 보다 못해 신원 보증까지 써가며 그를 입사시켰다. 그러나 그에게는 좁은 물이었다. 이 셋째 통과의례장에서 그는 그래도 5년을 견뎌냈다.

다음, 81년 KBS TV 문화담당 PD 시절, 이른바 ‘국풍 81’ 사건. 군사 정권을 찬양하는 호화판 무대를 다짜고짜 요구하는 당국에 그는 사직서로 대답했다. 자신과 정권 사이의 불가피한 대결 구도를 선명히 드러낸 이 사건은 최근 한국일보의 독자 칼럼 ‘잊을 수 없는 일’에도 게재됐다. KBS PD는 그래서 단 석달만에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예리한 통과의례로 남아 있다.

생활고에는 이력이 난 몸이지만, 이번 것은 보다 극심했다. 부인이 동덕여대 강사직을 갖고 있으니 망정이었다. 81~85년의 이 시절을 그는 또 다른 통과 의례로 본다.


졸업이라는 통과의례와는 인연없는 삶

그에겐 졸업장이 없다. 모두 2년동안의 감옥 생활로 정학과 휴학을 대신해야 했던 그는 전공 필수 과목 하나를 이수하지 못 했기 때문. “나는 졸업의 통과의례를 못 했지요.”

PD 시절, 문인들과 퀴퀴한 지하술집에서 울분을 삭히고 잠을 청하면 그는 희한한 꿈에 시달렸다. 어디건 입사하려 하지만 번번이 떨어지는 것. 생각해 보니, 자신은 졸업도 못 하지 않았는가!“통과의례는 그래서 중요한가 봐요.” 그가 농담조로 건네는 말이다.

“높은 호응 덕택에 통과의례 페스티벌은 이제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뜨내기 신세에서 벗어 나 상설 사무국도 이렇게 갖게 됐잖아요. 앞으로는 봄과 가을 한차례씩 펼쳐 지는 행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8월말까지 중국을 돌아다니며 이번 행사의 마무리 작업은 물론, 다음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다.

무엇보다, 이 페스티벌은 자신에게또 다른 통과의례이기 때문이다.

입력시간 2001/08/2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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