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이 누구길래 '정권'을 거나?

야당 퇴임압력, DJP 사이에 낀 햇볕 전도사

임동원(67) 통일부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어떤 존재일까.

8ㆍ15 평양축전 방북단 문제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공동여당인 자민련까지 그의 퇴임을 요구, 국회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한ㆍ자 동맹’이 가시화하는 형국이지만 김 대통령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민련이 계속 ‘몽니’를 부리자 공동집권 포기도 불사했다.

임 장관의 거취문제에 대한 청와대의 기본 입장은 그는 방북단 승인 과정에서 ‘정도(正道)를 걸었을 뿐 아니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의 퇴임은 곧 현정권의 트레이드 마크인 대북 햇볕정책의 후퇴를 의미하며, 때문에 야당의 공세는 임 장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햇볕정책을 무력화하기 위한 정략적 도전이라는 게 김 대통령의 판단이다.

△ 국회 통일외교위원회에 참석한 임동원 장관이
착찹한 표정으로 앉아있다.<최종욱/사진부 기자>

임 장관 자신도 “내 거취는 임면권자의 뜻에 따르는 것이 도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 심경에 대해선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그가 사표를 던지지 않는 것은 자리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물러날 경우 빚어질 정치적 파장 때문이라는 게 통일부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하지만 외부적 상황은 그를 점점 옥죄었다. 1995년 1월 김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던 아태평화재단의 사무총장으로 영입된 이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98년 2월), 통일부장관(99년 5월), 국정원장(99년 12월)에 이어 또다시 통일부 장관(2001년 3월~)으로 재직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그였지만 ‘불명예퇴진’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다.


햇볕정책의 제갈량

95년 이래 통일문제에 관한 한 한몸처럼 움직였던 김 대통령과 그의 관계는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김 대통령은 측근을 통해 임 장관을 영입하는데 무척 공을 들이다 잘 안되자 결국 자신이 직접 나서 품에 안았다는 게 정설이다. 삼고초려를 연상케 한다.

그가 영입된 것은 남북 고위급회담과 남북 비핵화선언에서 활약한 그의 ‘유화적’ 대북정책 노선이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김 대통령은 특히 치밀하고 합리적이면서도 정치적 야망이 없는 그의 스타일에 매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아태재단에 발을 디딘 후 첫 작품으로 김 대통령의 3단계 통일론을 완성하게 된다. 처음이 그렇듯 현 정부 출범 이후 그의 행보는 제갈량에 비견될 정도로 눈부셨다. 흡수통일 배제, 무력도발 불용, 교류협력 심화로 요약되는 김 대통령의 취임 초 대북정책 3원칙, 한반도 냉전 해체구상 등에는 어김없이 그의 손때가 묻어있다.

특히 98년 8월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조성된 한반도 긴장국면을 해소하기 위해 같은 해 12월 구체화한 한반도 냉전해체 구상의 경우 그의 역할이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외교안보수석 자격으로 99년 1, 2월 미국과 일본, 중국을 돌며 냉전해체 구상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같은 해 8월에는 미국을 방문, ‘페리보고서’에 결정적인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를 단초로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10년 주기 인생론자

임 장관은 자신의 인생이 10년 단위로 매듭지어 진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70년대 군사전략통, 80년대 외교관, 90년대 통일정책가로 맹활약했다. 때문에 군인으로서의 강직함과 외교관으로서의 부드러움, 관리로서의 조직관리 능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 임동원 장관은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DJ를 배석하는 등 햇볕정책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평북 위원 출신으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단신 월남한 뒤 미군 창고지기 등을 거쳐 53년 육사 13기로 군문에 들어갔다. 61년 육사 교수를 시작으로 약 10년간 게릴라전 등을 강의하면서 주로 이념문제를 연구했다.

그가 67년 펴낸 ‘혁명전쟁과 대공전략’이라는 책은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의 ‘모택동 사상’과 더불어 당시 학술 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였다.

70년대 그는 당시 합참본부장이었던 이병형 장군과 함께 한국군 전력계획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임 대령의 머리 속에서 군사력 증강계획의 코드네임인 ‘율곡’이, 재원조달을 위해 처음으로 ‘방위세’ 징수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대로 실천에 옮겨졌다.

19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소장으로 예편한 그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나이지리아, 호주 대사를 거쳐 87년에는 외교안보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그가 통일문제에 뛰어든 것은 90년대 남북고위급 회담 때부터다. 북한이 군축 주장을 들고 나오자 군축전문가에다, 외교력을 겸비한 적임자가 바로 그였다.

60여차례 대북 협상 경험을 거친 그는 93년 통일원 차관을 그만둔 뒤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저술활동을 했다. 세종연구소가 펴내고 있는 논문집 ‘국가전략’은 바로 그의이 논문집 1권1호에 쓴 논문을 딴 것이다.


매파들의 집중공격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차이”라는 말을 그는 평소 자주 했다. 그는 남북관계를 긍정적 시각 위에서 보고 헤쳐 나가려는 전략가이다.

그의 대북정책의 이면을 상징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이 훈령조작 사건이다. 91년 평양 고위급 회담과정에서 이동복 당시 안기부장 특보와의 갈등으로 표출된 이 사건은 그의 온건적 대북정책을 심화시킨 전환점이었다.

당시 남측대표로 참여했던 그는 협상을 통해 노부모 이산가족 고향방문 정례화, 판문점 면회소 설치, 동진호 선원송환 등 3가지 조건 중 두개를 얻는 조건으로 이인모 노인을 송환한다는 협상결과를 도출했지만, 이동복 특보가 묵살했다는 의혹을 골자로 한 이 사건은 정부내 매파와 비둘기파의 충돌로 정리되고 있다.

그가 김 대통령의 후광아래 쌓은 그간의 대북정책도 98년 6월 북한 잠수정 침투사건, 99년 서해교전 및 금강산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 등으로 공격을 받았다.

국정원장시절에는 정보책임자로서 어울리지 않게 대북협상의 전면에 나선다는 비판도 받았고 통일부 장관으로 돌아와서는 북한상선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그때마다 특유의 정치감각으로 대북정책을 조율하면서 그를 보호해왔다. 이 같은 사정 때문인지 대북정책에 관한 정부의 정책이 최종 조율되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에서 “임 장관이 독주한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기로에 선 역사적 소명

임 장관은 대북정책과 관련한 모임에서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님과 더불어 국가와 민족, 역사에 무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긴장완화에 최선을 다할 각오다.

20~30년 후 우리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 지 예단할 수 없지만 올바른 평가를 받기위해 노력할 것이다. 대통령님의 대북정책 구상을 보좌한 데 대해서도 역사의 심판을 받을 텐데, 만일 그게 잘못됐다면 전적으로 나의 책임으로 남게될 것이다.”

그의 이 말은 김 대통령이 그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동준 정치부기자

입력시간 2001/09/04 22:19


이동준 정치부 dj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