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농 꿈, 1년만에 허물어지나요"

서산농장 불하농임, 정부 중장기대책에 허탈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르겠시유.”

7일 오후 국내 최대의 간척지인 서산AB지구. 모진 가뭄을 이겨내고 누렇게 익은 벼가 바람이 출렁이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평년작을 훨씬 웃도는 대풍년을 이룬 들녘에서 당장이라도 농민들의 흥겨운 풍년가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 천석지기 농민 이종범씨가 수확을 앞둔 벼를 만지고 있으나 머리 속은 쌀 재고량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과 정부의 쌀 증산정책 포기 등에 대한 우려로 가득하다.

하지만 만나는 농민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두웠다. 그들은 수확의 기쁨 보다 답답함을 호소했다. “쌀이 남아돌고 값도 팍팍 떨어질 거라는데 맘이 편할리 있겠시유. 풍년인데도 걱정이 태산이구먼유.”


쌀값 하락 보도에 불한한 나날

충남 서산시, 태안군, 홍성군 등3개 시ㆍ군에 걸쳐 있는 AB지구의 경지면적은 1만121㏊(3,361만평)로 단일 영농단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다. 쌀 생산량은 연간 1만7,249톤으로 50만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이다.

바다를 메워 농토를 만든 현대건설은 이곳에서 20년 가까이 선진국형 기계화 영농을 벌여왔으나 그룹의 구조조정 차원에서 올 초 이곳을 일반에 분양했다.

지금까지 영농법인과 농민 400여명이 1,020만평을 평당 2만3,500원에 분양받았다. 피해 어민 배정분으로 매각이 보류된 1,400만평을 비롯한 나머지 농지는 현대건설 영농사업소의 전 직원들이 설립한 법인에서 임대받아 농사를 짓고 있다.

농민들의 평균 분양면적은 1인당 2만5,000평. 전국 농가의 평균 농지면적 3,000평에 비해 8배가 넘는다. 농민들은 올 봄 이 드넓은 땅에 첫 모내기를 하며 ‘부농(富農)의꿈’도 함께 심었다.

논과 벼는 농민들의 땀을 배신하지 않았다. 8월31일 AB지구에서 첫 수확을 한 김영상(47ㆍ경기 평택시)씨. 그는 논 4,300평에서 90가마를 수확했다. 이는 마지기(200평)당 4가마 꼴로 현대측이 기계화 영농으로 농사를 지은 지난 해의 1.7가마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김씨는 농지 및 농로ㆍ수로가 잘 정비돼 있고 거대한 담수호 덕택에 극심한 가뭄과 물난리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며 게다가 토질 자체도 매우 우수해 생산성이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내땅이다’라는 생각에 쏟은 정성이 지난해보다 수확을 급증시킨 요인중의 하나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조생종 햅쌀을 생산한 김씨는 80㎏ 1가마를 16만5,000원에 팔았다.

이 가격은 지난해 햅쌀가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아 농민들의 AB지구 정착이 성공작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햅쌀의 수확은 이 달 말께 본격화하기 때문에 이때의 쌀 값을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6만2,000평을 농사짓는 이종범(51ㆍ경기 평택시)는 이달 말께 수확을 계획하고 있지만 쌀값이 가마당 2만원까지 떨어질 수 있다는 보도에 불안하기만 하다.

논이 300마지기가 넘는 이씨는 말그대로 천석꾼. 그는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2월 전재산을 털어 농지를 매입했다. 지난 봄 허허벌판에 혼자 내려와 여관에서 잠을 자며 농사를 짓다 나중엔 자신의 논 옆에 컨테이너 박스를 놓고 숙식을 해결하며 여름 내내 구슬땀을 흘렸다.


대풍기쁨은 잠시, 은행 이자 걱정 태산

하지만 수확을 앞둔 요즘 농지를 구입하느라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에 대한 이자 부담에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이씨가 올 농사에 투자한 비용은 2억5,000만원. 농지구입 대출금 이자 6,000만원, 농약대 1,000만원, 비료대금 1,000만원, 건조장시설 2,000만원 등을 비롯해 인건비, 농자재, 종자구입대금, 콤바인 사용료등등…. 이씨가 예상하는 대로 올해 2억원의 소득을 올린다고 해도 5,000만원 정도가 적자다.

애초에는 5,000만원 정도의 순수익을 올려 융자금을 일부 상환할 계획이었으나 첫 해라 예상보다 이것 저것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장기적으로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애써 위안하지만 쌀값이 폭락하면 그야말로 주저앉을 수 밖에 없다.

이씨는 “남는 쌀의 처리방안을 정부가 세우지 않으면 농민은 죽을 수 밖에 없다”며 “국내에서 몇 안되는 대농도 이 모양인데 소농이 다수인 농촌 현실을 감안하면 농민들의 파탄은 불 보듯 하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최근 정부가 발표한 쌀 증산 정책 포기와 추곡 수매제 폐지를 골자로 중장기 대책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쌀 재고의 심각성과 이에 따른 양곡정책의 수정 등을 정부가 제때에 솔직히 알려주었다면 수억원을 들여 대규모 영농사업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며 정부의 무책임을 성토했다.

현대건설 영농사업소 전 직원 73명이 퇴직금을 모아 설립한 국내 최대의 현대 서산영농법인도 쌀값 동향과 정부의 정책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현대건설로부터 2,000여만평을 임대받은 이 법인은 지난해보다 20% 가량 증산을 예상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을 80%까지 끌어올릴 계획이지만 쌀값이 폭락한다면 증산도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직원 이해순(34)씨는 “간척지 쌀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높기 때문에 생산성을 높인다면 승산이 있다고 자신해 대기업 직원의 자부심을 버리고 농사에 모든 꿈을 걸었다”며 “정부의 쌀값 안정 대책만이 농촌이 살길”이라고 말했다.

이 법인 관계자는 “쌀은 일반 상품과 다르다. 쌀 재고가 증가한다고 섣불리 양곡 정책을 변경한다면 나중에 냉해나 태풍 등의 자연재해로 재고량이 바닥 난다면 어떻하겠느냐”며 정부의 대책이 단견이라고 주장했다.

AB지구에서 만난 한 농민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란 말이 무색해진 지 오래 됐지만 이젠 이 말이 아예 사라지게 생겼다. 정부의 이번 대책은 농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 농사를 포기하라는 것으로 밖에 안들린다”고 말했다.

전국농민회 충남도연맹측은 “정부는 통일 농업을 대비해 주곡의 안정적인 생산과 농업인을 살리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하며, 식량 주권을 외국에 내주는 이번 중장기대책은 철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농민회는 15일 대전역에서 대규모농민 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준호기자

전성우 사회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2 18:56


이준호 sjunho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