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사람들](17) 서울대 물리학부 임지순 교수(下)

"독창성 수용하는 연구풍토 돼야"

“공부를 잘 하는 것과 천재성이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뚜렷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임지순(50) 서울대 물리학부 교수는 수재의 대명사로 곧잘 꼽힌다. 중ㆍ고등학교도 시험을 치고 들어가던 시절, 최고 명문 학교였던 경기 중ㆍ고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울대도 수석으로 입학했기 때문이다.

“요즘도 ‘서울대 수석입학’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이 수식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했지요. 사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입시교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우리 시절에는 그랬죠.

대부분 학생들이 그랬듯이 70년에 대학을 입학한 후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종교에 귀의하면서 물리학에 의문을 가져보았고, 철학 등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빠져보기도 했습니다. 열병 같았죠.

물리학이 내가 갈 길이라는 확신을 어렵게 얻을 수있었습니다. 이 바람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학부 때 전공공부를 너무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 같은 방황은 소중한 밑거름이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형화된 교육의 껍질을 깨는 과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자·원자구조계산법 논문, 세계적으로 인용

임 교수는 미국 U.C.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메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박사 후 과정을 거쳤다.

그는 1979년 전자와 원자의 정밀한 구조 계산법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박사학위 논문을 정리한 이 논문은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이 500회 이상 인용, 한국 과학자의 논문 중 가장 많이 인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아마도 5번째 안에는 들 것 같다” 고 말했다.

임 교수는 이후 벨 연구소에서 4년간 근무했다. 벨 연구소는 20세기 최고 발명품으로 꼽히는 트랜지스터를 비롯 레이저, 통신위성, 이동전화, 고화질TV, 유닉스 시스템, 전자교환기 등 정보혁명의 총아들을 개발한 세계적인 연구소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상당한 차이가 있지요.” ‘한국과 미국의 연구풍토에 어떤 차이점이 있느냐’고 물어보자 임 교수는 이렇게 이야기 했다.

“벨 연구소 재직시 나와 비슷한 또래의 러플린이란 물리학자자 있었습니다. 그는 천재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동시에 엄청난 괴짜였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특이하고 생활도 기이해 미국사람들도 그를 가까이 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떠난) 이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습니다. 독창성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만약 러플린이 한국에서 태어나 연구를 했다면 학문적으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매장됐을 것입니다. 미국은 이런 인물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강점이 있습니다.”

임 교수가 거명한 러플린(Robert B. Laughlin)은 스탠포드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뒤 양자물리학을 고차원적으로 끌어올린 양자 유체를 발견하는 등 현대 물리학의 많은 분야에서 중요한 새 이론적 개념을 개발한 공로로 98년 다른 연구자 2명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수상했다.

“나 자신의 머리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경쟁에서 별로 져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러플린 같이 독창성이 넘치는 연구자들을 접하면서 지능과 집념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노벨상을 수상하기 위해서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연구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운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 받은 경우도 있습니다. 집념과 끈기를 가지고 괄목할 연구성과를 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임 교수를 한국사람 중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꼽고 있다“고 하자 그는 “고맙다”면서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고 겸손해 했다.

“기초학문의 경우 우리나라의 학문적 기반이 쌓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 입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국력에 비해 과학에 투자를 많이하는 편입니다. 도약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적 토양은 아직 미성숙한 상태입니다. 미국에서 물리학회 총회가 열리면 5,000여명 의학자들이 모여 5일간 밤낮으로 토론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1,000여명이 모여 이틀 간, 그것도 낮에만 회의를 진행합니다. 물리학 같은 기초학문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한국에서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기초학문 홀대는 잘못된 교육정책

그는 우리나라의 교육에 불만이 많다.

“요즘 학생들은 예전보다 분위기에 덜 눌립니다. 창의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은 하향 평준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창의성을 살리려면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의 수준은 예전만 못합니다. 게다가 기초학문이 홀대를 받고 있습니다. 응용학문을 해야 좋은 직장에 다니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분위기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리학을 공부하면 좋은 연구자는 물론이고 벤처사업을 이끌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임 교수의 연구실한 구석에 등산화가 자리를 잡고 있다. “과학연구는 시간이 많이 듭니다. 어떻게 시간을 확보하느냐는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연구에 직접 도움이 되지 않는 시간을 최대한 줄여 연구할 시간을 늘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보직교수도 사절하고 있습니다. 등산은 나의 이런 시(時)테크와 가장 궁합이 잘 맞습니다. 테니스를 하려면 다른 사람과 약속을 해야 하지만 등산은 마음이 내킬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등산화만 신고 나서면 산은 항상 거기에 있습니다. 학교 뒤 관악산에서 땀을 흠뻑 흘리고 나면 몸도 좋고, 정신도 맑아집니다.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릴 수 있어 등산이 좋습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들었다. 임 교수는 대통령 정책자문위원이며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연구 이외의 시간을 최대한 줄이려는 노력과 사회참여를 하는것이 상충되어 보였기 때문이다.

“사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식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연구를 해야 하고 연구를 하려면 연구에 시간을 많이 쏟아야 합니다.(기자가) 시민단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정확히 말하면 직접 활동을 아직까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선언문 등에 서명해 동참의사를 밝히는 방식으로 뜻을 전하고 있는 수준입니다. 정책자문위원은 주위 분들이 권유를 하는데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참여하고 있습니다.”

임 교수는 연구를 할수록 자연이 더 신기하고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탄소나노튜브만 해도 그렇습니다. 평면이 튜브 형태로 바뀌면서 마치 전혀 다른 물질인 것처럼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까.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태고부터 존재했던 탄소이지만 우리는 탄소에 이런 신기한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요즘에서야 발견한 것입니다. 연구를 할수록 신(神)을 느낍니다.”

김경철 주간한국부 차장

입력시간 2001/09/12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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