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 서울 관악구 관악산(冠岳山)

관악산은 서울 관악구, 금천구와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의 경계에 자리한 높이 629.1m의 산으로 전체면적은 1,922만m이다.

관악산은 예로부터 경기금강 또는 소금강이라고 불려왔으며, 근기오악(近機五岳:송도의 송악, 가평의 화악, 적성의 감악, 포천의 운악, 서울의 관악)의 하나이다.

△ 서울대 정문에서 바라본 관악(冠岳). '岳' 자에 걸맞게 해마다 관모(冠帽)쓴 학·석·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한양을 에워싼 산가운데서 남쪽의 뾰죽한 관악은 화맥(火脈)을 지닌 산으로 조선조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火氣)을 끄기 위해 경복궁앞에 서수(瑞獸)인 해태를 만들어 세우게 할 정도로 ‘불기운의 산’이라는 유래가 전해진다.

그러고 보니 굳이 풍수지리설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관악의 형상이 마치 바람에 일렁거리며 타오르는 불꽃같이 보인다.

어쨌든 도읍의 정남쪽에 있는 이산을 두고, 조선조 초기 권신 정도전과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간에 서로 입씨름을 벌였다. 무학은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고 정궁인 경복궁을 지으면, 불산인 관악산에 눌려 나라에 큰일(5세가 가지 못해 혁명이 일어나고 200년 만에 큰 난리)이 일어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고집에 따라 오늘의 서울시와 같은 형태의 도읍이 들어서게 되었으니…, 그 뒤 과연 얼마 안되어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피비린내 나는 왕자난과 5세 만에 수양대군에 의한 왕위 찬탈이 생기고, 200년 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은 잿더미로 변했고 나라안은 쑥밭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산 정상인 연주내 부근에는 군데군데에 조선조 초기에 팠다는 못의 흔적도 관악산의 불기운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산의 형세는 비록 태산은 아니나 준령과 괴암기석이 늘어서 장엄함을 갖추었다.

관악의 서울대학교 쪽과 과천시의 계곡을 일러, ‘자하동(紫霞洞)’이라하는데 실제 자하동은 과천시 향교 어귀에서 관악을 오르는 계곡을 말한다.

자하동은 조선조 후기의 학자이자 시인으로서 시, 서, 화의 3절(三絶)로 이름을 날렸던 신위(申緯)의 호가 자하로서 과천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이곳을 ‘자하동천(紫霞洞天)’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또, 관악 기슭에 태어난 인물로는 고려때 인헌공 강감찬(姜邯贊)장군을 들수있다. 강감찬 장군은 관악의 동쪽 산줄기 끝자락, 봉천동 낙성대(落星垈)에 태어나 고려조의 공신으로 남침해오는 글안군 40만을 격파, 국위를 떨친 역사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관악의 북서쪽 가지산의 하나인 삼성(三聖)산은 고승 원효, 의상, 윤필 등이이 산속에 은둔, 일막, 이막, 삼막 등의 세암자를 지어 수도하였는데…, 일막 이막은 임진왜란때 불타버리고 지금은 삼막만 남아있으니, 이것이 곧 삼막사(三幕寺)이다.

1975년 서울대가 관악의 북쪽계곡 아늑한 곳으로 이전, 자리하면서 옛 풍수설이 지닌 ‘불의 산’의미가 다시 다른 뜻으로 각색되고 있다.

“온 국민이 아끼는 학문의 전당인 서울대학교를 관악에 옮기니, 관악이 품은 불의 뜨거운 정기가 지성(知性), 야성(野性)의 젊은 정열과 결합, 자유와 연주의 횃불로 성화돼, 나라의 동량재(棟梁材) 산실이 되고 있다고…”

어찌되었던, 관악(冠岳)의 ‘관(冠)’자에 걸맞게 해마다 수많은 관모(冠帽)를 쓴 학ㆍ석ㆍ박사들을 배출하고 있으니, ‘관(冠)’자와 무관하다 할수 있겠는가!

서울대 정문에서 바라본 관악(冠岳). ‘冠’ 자에 걸맞게 해마다 관모(冠帽)를 쓴 학ㆍ석ㆍ박사를 배출하고 있다.

입력시간 2001/09/18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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