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카페 (75)] 과학을 뛰어넘는 정신세계

과학이 지극히 물질적이고 객관적이라지만, 오래 전부터 지극히 정신적이고 주관적인 논리가 개입되어온 경우가 있다. 바로 위약(僞藥ㆍ가짜약)이다. 가짜약을 진짜약으로 처방해 주면 진짜약의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 이 위약효과는 "물질은 정신의 지배를 받는다"는 하나의 실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위약은 일종의 만병통치약이다. 생활환경이 어려웠던 시절 배가 아플 때 상처소독약인 머큐로크롬을 벌겋게 발라서 낳았던 원리. 그래서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일리가 있었다.

사실 1940년대까지도 미국의 의사들은 위약효과를 내기 위해 설탕약을 여러 모양과 색으로 만들어서 환자에게 주던 것이 다반사였다. 의학이 발달한 최근에도 위약의 사용은 여러모로 활용되고 있다.

통상적으로 위약을 받은 환자들의 3분의1 가량이 만족스런 증세의 호전을 경험한다. 이 같은 위약효과는 먹는 알약뿐만 아니라 수술에서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위약실험으로 1964년 로버트 스턴바흐 박사의 경우를 들어보자. 그는 3 그룹의 피험자들에게 약효가 전혀 없는 알약을 똑 같이 주었다. 그리고 한 그룹에는그 약을 먹으면 위장이 강하게 울렁거릴 것이라고 얘기하고, 다른 그룹에는 그 약이 위장활동을 억제해서 위가 팽만하고 무거운 느낌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룹에는 이 약은 가짜약이라고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놀라운 것은 세 경우 모두 똑같은 가짜약이었지만 피험자의 2/3가 의사가 말한 위장의 변화가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한, 튤레인 대학의 팰리스 박사는 불감증 여성의 성적 흥분을 회복시키기 위한 실험에서 바이오피드백 기계를 이용했는데, 흥분의 척도가 되는 질의 혈류를 측정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성적 자극신호가 어떻게 기계에 나타나는지를 보여준 뒤, 30초 후에 환자의 질 혈류가 증가됐다는 가짜 신호를 환자에게 보여줬더니 정말로 흥분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위약이 성공적으로 작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위약이 주어지는 환경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의사들의 하얀 가운, 청진기 등이 환자에게 치료효과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또는 믿음)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컴퓨터가 약을 주면 위약효과는 대개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치료에 필요한 요소가 될 희망과 자신감이 분자수준에서 보면 뉴런과 신경전달물질 사이의 관계 변화, 즉 뇌의 화학적 구조변화와 연결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반면에 위약의 효과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도 제기되고 있기는 하다. 위약을 먹지 않고 긍정적인 심리적 환경만 주어져도 비슷한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최근 덴마크의 코펜하겐 대학 연구팀이 전 세계 114건의 임상실험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의 연구에서 위약을 투여 받은 부류와 이를 투여 받지 않은 부류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즉 꼭 위약을 투여 받지 않더라도 환자가 효과적인 치료를 받았다는 의식을 가지면 위약의 효과가 그대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미국 뉴저지 치과대학의 스티븐 슈나이더박사도, 많은 환자들이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임상 연구에 참여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식욕이 증가하거나 자신의 건강에 대해 좀더 세심한 신경을 쓰는 경우가 흔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 위약을 먹어서건 환경이 만들었건, 추상적 개념인삶의 의지가 물리적인 실체 즉 몸을 지배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원효대사가 간밤에 마신 꿀맛 같던 물이 아침에 보니 해골에 담긴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온갖 역겨움과 구토를 느끼고 득도한 것처럼, 물질은 정신으로 간단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말이 결코 그저 있는 말이 아닌 것이다.

입력시간 2001/09/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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