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911 테러 대 참사] 21세기 '얼굴없는 전쟁' 시작됐다

불특정 다수 노린 '생명게임', 도전받는 초강대국

초강대국 미국 경제ㆍ군사력의 심장부에 비수를 꽂은 이번 테러 참사는 21세기 지구촌이 새로운 유형의 폭력 위협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다.

서방 국가들이 주창해 온 ‘글로벌화 시대’에 상응하는 신개념의 폭력과 긴장, 갈등의 유형이 현실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군사적 위험이 고조됐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포화가 멈춘 1945년부터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해체된 1990년대 초까지의 동서 냉전 기간. 당시 미국,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방측과 소련, 동구권을 축으로 한 공산권 양 진영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첨예하게 대치 했다.

전술 핵무기와 대륙간 탄도탄(ICBM)수준을 뛰어 넘어 우주ㆍ항공 분야인 ‘스타 워즈’까지 고려할 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당시 동서 양측이 보유한 핵무기는 지구를 몇 번 날려 버리고도 남을 가공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런 양측의 팽팽한 군사적 대치는 역설적으로 ‘힘에 의한 상호 견제와 균형’(The Power of Balance)을 가능케했다. 공멸의 가능성에 대한 양측의 우려가 군사적 긴장 속에서 ‘위태로운 평화’를 이끌었던 것이다.

양측은 내부적으로는 상대를 겨냥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도 또 한편에서는 핵확산금지조약(1968년)을 시작으로 SALT, START로 이어지는 잇단 전략핵무기 제한 협정을 발효시키며 자국과 인류의 파괴를막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도전받는 세계화, 패권화

1980년대말 이런 힘에 의한 균형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막을 내렸다. 당시 인류는 잠시나마 지구를 파멸로 이끌 세계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났다고 안도했다. 전세계는 비로소 자유ㆍ민주주의의 선봉인 미국을 중심으로 평화와 발전의 번영기를 맞을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힘에 의한 불안정한 균형이 무너지면서 세계 각국은 또 다른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전세계 군사ㆍ외교ㆍ경제ㆍ문화ㆍ정치의 구심점이 된 미국, 그리고 이를 따르는 서방 선진국들이 추진하는 세계화, 경제 패권화가 바로 그것이다. 유일 강대국이 된 미국은 자국의 막대한 경제, 외교력을 앞세워 세계정치, 경제를 자국의 패러다임의 틀 안에 넣으려고 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자유롭게 세계 정치ㆍ경제 구도를 짜고 그에 따라 거침없이 행동 한다. 어느 나라도 공개적으로 나서 미국을 제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최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유엔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 이스라엘과 동시퇴장, 탄도탄요격 미사일 협정(ABM) 파기 압박, 기후변화 협약 관련 교토의정서 탈퇴, MD 추진 등이 그 단적인 예다.

미국의 세계화 정책에 가속을 붙인것이 경제 호황이다. 미국은 1980년대 말부터 드라이브를 건 정보통신과 금융 산업이 1990년대 중반부터 빛을 보기 시작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세계장악에 성공했다.

1990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장기 호황으로 미국은 20세기 마지막을 풍요와 번영으로 장식했다. 전세계 군사ㆍ외교를 관장하는 경찰 국가를 넘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금융의 헤드쿼터로서의 역할도 함께 갖게 된 것이다.


유일 강대국 미국 위협하는 지하조직

하지만 ‘영원한 절대 강국은 없다’는 역사의 교훈이 말해 주듯 미국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은 이제 또다른 유형의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바로 반정부 과격 단체, 이단적 종교 집단, 소수 민족 투쟁 조직, 경제적이익 집단, 몽상적 과격 분자 등과 같은 특수 목적을 지닌 비밀 결사 조직들의 발호이다. 이들은 특정 집단이나 정부, 더 나아가서는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맞서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 지하 세포조직은 자기 단체나 민족, 종교 같은 집단 목표를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국제 주요 시설이나 정부 기관, 공공 장소 등을 대상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고 요인 암살, 국지전 등의 과격한 방법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과 존재를 외부에 알린다.

▷ 무너지는 미국의 자존심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면서 먼지가 거대한 구름처럼 번지고 있다.

일부 지하 단체들은 마약이나 무기 밀거래 등을 통해 축적된 자금으로 첨단 장비를 구비, 정부나 국가 전복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들 지하 조직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목적 달성을 위해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킨다는 것이다.

정부나 국가, 더 나아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맞서기 위해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무모한‘생명 게임’을 벌인다. 수만명의 피해자를 낳은 이번 미국 테러 대참사도 이런 지하 조직이 자신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 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국가나 정부의 테두리밖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인권, 생명 같은 최소한의 도덕성 조차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더 잔혹하고 무자비한 범행을 자행한다.

이런 지하 조직은 중동, 중앙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같이 민족이나 국가, 종교간의 갈등을 벌이고 있는 지역에 주로 집중돼 있다.

이번 미국 테러 참사의 배후로 지목되는 오사마 빈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를 비롯해 이스라엘과 종교 민족적인 충돌을 빚고 있는 팔레스타인의 또 다른 조직인 ‘하마스’와 ‘이슬람 지하드’, 그리고 알제리의 ‘이슬람 무장그룹’, 레바논의 ‘헤즈볼라’, 아프카니스탄의 ‘알 카에다’, 이란 극렬주의자들인 시아파 등이 대표적인 조직이다.

중동 이외 지역으로는 스페인 정부에 반기를 든 ‘바스크 조국과 자유’, 영국으로부터 독립 투쟁을 벌이는 ‘아일랜드공화군(IRA)’,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 남미 콜롬비아의 반정부 조직인 ‘M-19’, 그리고 공산정권 수립을 위해 싸우는 필리핀의‘신인민군’ 등이 있다.

서방 초강대국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물론 독립이나 인권, 자치권 확보를 위해 싸우는 저개발국가의 투쟁 조직과는 다른 성향을 띈다. 주로 소수파 과격 종교, 이념 집단, 인종 차별단체, 경제적 이익 집단, 지하 폭력조직, 몽상적 사회 단체 등 다양한 유형을 띄고 있다.

1995년 600명의 사상자를 낸 오클라호마 연방 정부 청사 건물 폭파 사건의 배후 조종 세력인 ‘미국 민병대’와 1994년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 독가스 사린을 살포해 200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의 옴진리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직접적인 인명 피해는 나지 않았지만 지난해 미국 연방정부와 다수의 다국적 기업 전산망을 마비시킨한 해커 조직도 이런 유형의 하나다.

이제는 독가스나 치명적인 바이러스 같은 생화학 무기를 퍼뜨려 무고한 수천 수만명의 인명을 희생시키는 가공할 폭력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서 발생할 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가 됐다.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회색전쟁’

따라서 이들 지하 세포 조직은 21세기 인류의 분쟁과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될 전망이다. 이들 조직은 소수 정예로 운영돼 근거지나 주동자의 실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더구나 범행도 자살 폭탄이나 항공기 하이 재킹 같은 대량 살상을 일으키면서도 증거를 남기지 않는 수법을 쓰기 때문에 추적이 어렵다. 이제 인류는 뚜렷한 공격 대상도, 확실한 전선도 없는 전쟁을 치려야 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테러 공격은 미ㆍ소냉전 시대에서는 도저히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팽팽한 힘의 균형이 작용하는 상황에서 이런 무모한 도발 행위는 곧 인류가 파멸하는 3차 대전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같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 중심의 단일 패권시대에는 소수 과격 조직의 비이성적인 돌출 행위가 계속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이번 미국 대참사를 ‘21세기형 전쟁의 서막’이라고 분석한다. 이제 국제간의 전쟁이나 분쟁은 국가 대 국가가 아니라 국가나 정부와 소수 집단, 더 나아가 ‘인류와 세포 조직간’의 비대칭적 대결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적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그래서 객관적 타당성을 갖고 상대를 응징할 수도 없는 그런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주장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아무 죄의식 없이 무고한 다중을 상대로 폭력을 가하는 만인 대 세포 집단간의 투쟁의 시대가 된 것이다.

첫 희생양이 됐지만 미국은 수년전부터 이런 위협을 감지하고 있었다. 미국 국방부는 지난해 비밀 연구보고서 ‘테러 2000’에서 21세기는 ‘슈퍼 테러리즘’의 시대라고 보고 자국의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이 보고서에는 ‘테러 분자들은 자신을 주목 받는 연기자로 여기며, 세계를 무대로 대량살상 무기 공격을 감행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1993년 7,850만달러였던 테러 방지 예산을 지난해에는 3억 달러로 점차 증가해 왔다.

학술원 회원인 안병준 전 연세대교수는 “21세기에 전세계는 위협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정형 안보 위협 시대를 맡게 될 것”이라며 “역설적이지만 세계 정치ㆍ경제를 좌우하는 미국과 서방 선진국들이 추진하는 지구촌의 세계화가 이런 위협을 가중시키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흔히 이번 미국의 테러 참사를 ‘보이지 않는 전쟁’ 또는 ‘회색 전쟁’이라고 부른다. 건국 이래 사상 최악의 희생을 치른 미국은 힘의 논리에 따라 ‘보이지 않는 공격 실체’에 대한 가공할 수준의 보복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인 보복은 분명 또 다른 무고한 희생자들을 낳을 것이고, 그것은 더욱 강력한 반미 성향의 지하 세포 조직을 탄생시킬 것이다. 절대 강자 대 지하 세포집단간의 피비린내 나는 회색 전쟁의 쳇바퀴만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처절하게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09/19 10:28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