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해의 中國통신] 왕융칭회장의 萬言書

재벌이 정치권력과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대만도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대만에서도 재벌이 정치권을 건드려 득 볼 일은 별로 없다. 특히 집권당의 세력이 강력할 때는 더욱 그렇다. 과거 국민당 집권 시절 대만 재벌은 잔뜩 움츠려 있었다.

하지만 지난해 반세기만에 국민당 정권이 무너지고, 원내 소수파인 민진당이 집권한 이후 전통적인 재벌-정치권 관계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재벌이 정치권을 상대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정책상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현상이 잦아지고 있다.

재벌 목소리를 대변하는 선봉장은 대만 거대 재벌인 타이수(臺塑ㆍ포모사 플라스틱) 그룹의 왕융칭(王永慶) 회장. 왕 회장의 타이수 그룹은 지난해 자산가치로 전세계 화상(華商) 기업 중 18위를 차지한 바 있으며, 제조업과 전자분야에서 대만 내 선두를 달리고 있다.

왕 회장이 정치권 공격의 도구로 삼은 것은 만언서(萬言書). 긴 문장을 일컫는 만언서는 중국과 대만에서 정책제언이나 비판의 견표출 수단으로 쓰인다. 만언서라고 해서 반드시 글자 수가 1만자일 필요는 없다. 성격상 만언서는 상소문과 대자보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고 보면된다.

왕 회장은 9월4일 장장 4만여자에 이르는 만언서를 천쉐이비엔(陳水扁) 총통과 장쥔슝(張俊雄) 행정원장(총리) 등에 보내 강렬한 불만을 표시했다.

‘대만경제 상황을 정확히 보고,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하자’는 제목의 이 만언서는 크게 3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양안관계(중-대만 관계)와 관련해 리덩후이(李登輝) 전총통을 맹렬히 비판했다. 둘째, 대만독립 주장에 대해서는 재난을 초래할 것이라며 정면으로 반대했다. 마지막은 각 당이 정쟁에 몰두하는 바람에 입법원(국회)이 오히려 민생에 해를 끼치는 기구로 전락했다는 경고성 비난.

왕 회장의 리 전 총통 비난은 대중국 경제정책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왕 회장과 리 전 총통은 대중국 노선에서 정반대 방향으로 달려왔다. 왕 회장이 대만기업의 적극적인 대중국 투자를 강조한 반면, 대만독립 노선을 밟아 온 리 전 총통은 중국에 대한 경제종속을 이유로 투자를 제한했다.

이 때문에 왕 회장은 과거 리 전 총통으로부터 ‘공산당에 대한 아첨꾼’으로 공격당한 바 있다.

왕 회장은 만언서에서 리 전 총통이 12년간 집권하면서 대중국 투자를 제한한 결과 오늘날 경제위기를 맞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대륙에 진출한 10만여개의 대만 기업들이 정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무관심속에서 자력갱생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대륙 시장 선점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투자제한 정책으로 인해 실기했다는 것이 왕 회장의 비난이다.

왕 회장의 리 전 총통 비난은 사실상 천 총통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해야 한다는 견해가 강하다. 천 총통과 집권 민진당 역시독립을 지향하고 있어 노선상 리 전 총통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왕 회장은 결국 리 전 총통을 비난함으로써 천 총통으로 하여금 대중국 투자개방을 확대하도록 촉구한 셈이다.

왕 회장이 대만독립에 대해 분명한 반대입장을 개진한 것도 주목할 만 하다. 대만독립 주장은 중국투자 기업에는 금기중의 금기다. 독립 성향을 내보였다간 중국 당국에 의해 축출당하기 십상이다. 재벌총수가 양안정책을 놓고 큰소리 친다는 것은 중국이 대만 재계를 든든한 우군으로 확보했음을 의미한다.

왕 회장에 의해 입법원이 싸잡아 비난받았지만 정치권은 아직 분명한 대응을 하지않고 있다. 재벌이 정치권에 큰소리 칠 수 있는 배경에는 20여년 만의 최악 경제불황과 정치력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배경은 중국대륙의 흡인력이다. 대만정부가 끝내 발목을 잡을 경우 궁극적으로 기업들이 중국으로 거점을 옮길 수 있다는 점에서 재계는 히든카드를 갖고 있다.

배연해 기자

입력시간 2001/09/25 19:48


배연해 seapower@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