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섬을 사랑한 시인 이생진옹

섬이 되기 위해 바다로 간 노시인

평생 섬을 사랑한 사람. 시인 이생진(72)옹이 걸어온다. 그 뒤를 성산포가 따라 걸어온다.

"시만 읽었을땐 막잠바를 입고 소주를 좋아하는, 그런 털털한 분인줄 알았는데, 상상이 틀려버렸어요." "하하. 그건 제가 때가 묻어서 그래요. 원래는 혼자 배낭을 메고 가서 소주 한 잔, 해삼 한 토막 먹고 섬 곁에서 뒹구는 날이 실제로 많았지."

스스로 바다가 된 노시인. 어느덧 고희를 넘겼다. 자신의 시어만큼이나 간결하고 깔끔하게 연륜이 물들었다. 몸가짐도, 말투도, 차림도 군살 하나 없다. 둘러메고 온 작은 가죽 가방엔 무엇이 들었을까? 굳이 묻지 않기로 한다. 지나친 호기심도 시인에겐 결례다.

[ 성산포에서는/ 교장도 바다를 보고/ 지서장도 바다를 본다/ 부엌으로 들어온 바다가/ 아내랑 나갔는데/ 냉큼 돌아오지 않는다/ 다락문을 열고 먹을 것을/ 찾다가도/ 손이 풍덩 바다에 빠진다/ 성산포에서는/ 바다가 나를 더 많이 본다 - '바다를 본다' 중(中) ]

살긴 서울에 살지만, 70년이 넘도록 그는 '바다를 끊지' 못하고 있다. 주소지가 어디든, 시인의 마음엔 지도마다 섬 뿐이다. 없는게 없는 도회지도 갑갑하다하고 요즘도 수시로 섬으로 달려간다. 갈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가 며칠이 지나면 또 서울이 궁금해져 돌아온다.

서울집에 돌아와서도 만지는 건 섬에서 건져온 싯구들 뿐이다. 성산포엔 그를 위한 거처도 한 칸 있다.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 방, 있는거라곤 시야 가득 안기는 섬과 바다뿐이다.

어민 한 분이 그물 보관 창고를 손질해 내 주었다. 어느 겨울엔 한기도 참고 글을 쓰다가 몸이 상한 적도 있다. 밤엔 촛불을 켜고 시를 쓴다.


“섬은 계절마다, 볼때마다 달라요”

"그렇게 쓰고도 또 쓸 것이 있나요?"

"그럼요. 계절마다 다르고, 볼 때마다 달라요. 섬도 섬마다다 달라서, 예를들면 거문도는 역사와 자연이 있는 섬, 우도는 거기에다 관광객들의 화사한 분위기도 있지만, 반면에 만재도는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것처럼 쓸쓸하고도 신비로와요."

"선생님 시는 너무 외로와요. 보는 사람까지도 더 외롭게 만들어요."

"맞아, 내 시는 외로와요. 내가 외롭거든."

"왜 외로와야해요?"

"고독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예요. 사람은 외로운데서 에너지가 나와요. 하다못해 도둑도 외로울때 아이디어가 나오는 거예요."

시인은 '그리운 바다 성산포', '하늘에 있는 섬'등 지금까지 스물다섯권의 시집을 펴냈다.

'걸어다니는 물고기'등 몇 권의 산문집도 있다. 지난 5월에 나온 시집 '혼자 사는 어머니'가 가장 최근 작품이다. 여서도, 청산도 등 섬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늘 섬 얘기만 쓰시나요?"

"아니예요. 사람들 이야기도 쓰고, 그 전엔 곤충 이야기를쓴 것도 있어요. 무인도에 가면 살아 움직이는 거라곤 곤충과 나뿐이거든."

"그래봐야 다 섬에 있는 것들이잖아요."

"하긴 그렇네."

[산꼭대기에서 산맥끼리 손잡은 것을 보는데/ 왕개미가 바지 속으로 들어와서 내 고추를 잡아당긴다/ 시비를 걸려면 나와서 걸 일이지 바지 속으로 들어와서/ 물어뜯고 꼬집고 잡아 당겼다 늦추고 늦췄다 잡아당기고/ 한참 그러다가 바지 밖으로 나와서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내 고추를 꽃으로 봤는지 아니면 벌레로 봤는지/ 떼어주면 가지고 갈 눈치다/.../ 내 고추를 떼지는 못했지만 개미 목에/ 노란 훈장 하나 달아주고 싶다 - '개미'중 ]

시인의 고향은 충남 서산이다. 섬은 어려서부터 친숙한 놀이터였다. 집에서 몇킬로미터만 달려나가도 안면도, 간월도 등이 소년을 품에 안았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중3때 선친을 잃은 뒤 종이와 물감 살 돈조차 짐스러웠다. 화첩을 접고 책을 폈다. 자신에게 속삭이듯 글을 썼다.

"그땐 정말 좌절했어요. 내가 왜 이런 운명에 처해야 되는가, 아버지 무덤앞에 주저앉아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도 했고, 나는 장남이었거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바느질 품도 팔고, 행상도 하면서 우리를 키우셨어요."


“얘야, 네 시는 왜 그렇게 슬프냐”

이름난 시인이 된 아들에게 생전의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얘야, 네 시는 왜 그렇게 슬프냐?' 깜짝 놀란 아들의 대답은 그랬다. '세상이 슬퍼서 그래요.'

고교땐 곧잘 무전여행으로 떠돌았다. 언제나 바다가 가까이 있었다. 떠오르는 단상들을 메모로 끌적이다가 밤이면 간이역에 몸을 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면 거지들과 함께 누워있는 일도 많았다.

아래로 동생이 넷. 6년제 농업학교를 마친 뒤 일찍 생활전선에 나섰다. 어머니를 돕고 싶어 한때 싸전에서 일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성적인 남학생의 장사솜씨는 신통치 않았다. 딱하게 여긴 주변 어른의 소개로 잠깐동안 관공서에 근무한 경험도 있다.

중학교 영어교사와 고등학교 미술교사 자격을 취득한 뒤 교사생활을 하던중 6ㆍ25징병으로 군인이 되었다. 군생활중 2년간의 대학공부를 거쳐 제대후 다시 직장생활을 하며 야간대 학생이 되었다. 주경야독으로 30대엔 대학원에도 진학하기도 했으나 글을 쓰기위해 도중에 접었다.

보성, 성남 중고교 등에서 30여년간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난히 아이들에게시 암송시키기를 좋아하던 영어선생님이었다. 8년전인 1993년 퇴직했다. 아이들을 사랑했지만, 섬에 가고 싶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남들보다 앞당겨 퇴직한 뒤 섬을 찾아 다녔다.

"그럴려고 진작부터 돈을 모았었어요. 평생 매달 월급에서 1%씩 따로 떼어놓았지요. 그걸 모은 돈이랑 퇴직금이랑 받아서, 그중 내가 쓸 돈 얼마간만 빼고는 나머지는 집사람에게 다 줬어요.

여자도 경제적인 힘이 있어야 자유로운거니까. 사실 그동안 섬에 다니느라 가족에겐 많이 소홀했지. 집사람 친구들은 '네 남편은 왜 그렇게 섬에 '씌워'있냐'고 했을거예요. 나이가 들고나서 '그래도 당신 덕분에 내가 그만큼 시를 쓸수 있었던 것 같다'고 종종 고맙다는 말도 해요. 진심이예요. "

무인도 500여개를 포함해 국내의 섬은 약 3,200개. 그중1,000개쯤을 만났다. 만재도는 10년이나 별러서 만난 섬이었다. 어렵사리 찾아간 끝에도 풍랑에 발길이 막혀 목전에서 뱃머리를 돌려야 한 기억도 두어차례 된다.

뱃편도 간단치 않지만, 어떤 섬은 18일이나 끊임없이 걸어다니며 글을 쓴 곳도 있다. 섬은 시가 되었다. 시인은 등대가 되었다.

무명시절, 간첩으로 오인받아 수시로 검문을 당했다. 그나마 나으면 부동산 투기꾼이란 의심이었다. 한번은 배를 타고 가다가 출석부를 부르듯 줄줄이 섬 이름을 외어 맞히는 그를 보고 선장까지 간첩 아니냐며 놀랐다.

검문을 받아 시 노트가 든 가방이 알몸처럼 뒤져질땐 너무나 기분이 상해 다신 오나봐라 하던 섬이지만 얼마뒤면 슬그머니 또 길을 나서던 시인.


성산포 일출 앞에 서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

국민적 애송시가 된 '그리운 바다 성산포'가 태어난 건 우연이었다. 다른시를 정리할 겸 성산포를 찾은 새벽, 일출앞에서 뭉클대는 가슴을 참을 수 없었다. 허겁지겁 바다곁으로 뛰어갔다.

성산포가 부르고, 시인은 받아적었다. 미처 노트도 챙겨가지 못한 터라 급한대로 손바닥에, 뒷주머니에서 끌려나온 껌종이에 글을 적어넣었다. 성산포 시가 대부분 짧은 건 그 때문이다.

196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10번째 책이 나올때까지만 해도 직접 프린트를 해가며 시집을 만들었다.

성산포 연작시 앞에 처음으로 출판사가 나섰을땐 그만한 감격이 없었다. 별다른 계약조건 하나 없이 건네준 원고가 20여년간 시집으로, 시낭송 음반으로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

아무런 계약사항이 없었기에 지금도 인세 한 푼 받지 않는 스테디셀러지만, 여전히 시인의 마음엔 당시 출판사에 대한 고마움이 살아있다.

"얼마전엔 출판사에서 성산포 시집 2편을 내는게 어떻겠냐며 비행기 삯까지 줬는데, 성산포에 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2편을 내면 오히려 1편까지 망칠 것 같아 받았던 비행기 삯을 되돌려줬어요.

그래도 가끔은그 시들을 읽다보면 비록 내가 썼지만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때가 있긴 있어요. 몇몇 구절은 지금봐도 썩 괜찮아보여요. 그때 내가 어떻게 그런반짝이는 표현들을 생각해냈을까, 참 흐뭇해요.

아마 책상 앞에 앉아 상상으로 쓴 시가 아니라 직접 내 몸으로 걷고 보며 느낀 그대로 써서 그럴거예요 .초고를 쓰고도 세번이나 같은 자리에 찾아가서 싯구와 똑같이 느껴지는가 확인했던 시들이거든요."


스스로 외로워지러 그는 섬으로 간다

그가 새해를 시작하는 곳도 성산포다. 해마다 정초면 장엄한 첫 일출속에서 육성으로 자신의 연가를 낭송한다. 올해만해도 1,000여명이 그와 함께 있었다. 성산포는 섬을 사랑한 시인의 '큰집'이다.

"서울에선 어떻게 시간을 보내세요?"

"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씁니다. 사흘에 한번쯤은 홈페이지(www.poet.or.kr/sj)에시를 올리고, 매달 한번씩 인사동에서 시낭송회도 열어요.

그외에도 문학바깥의 현실을 놓치지 않으려고 공부를 많이 합니다. 나는 내가 힘든 시절을 보내서 그런지 귀족적인 분위기보다는 아픔을 지녀본 사람들의 삶이나 작품이 더 끌려요.

조성모나 서태지의 노래, 고흐의 그림도 그래서 좋아해요. 서태지에게선 정열이 보여요. '울트라맨이야'만 해도 '오늘의 영웅은 나!'라고 외치는 그 패기가 좋아요.

영웅이나 성공은 이름에 있지 않아요. 나쁜 짓 안하고 남에게 폐가 되는 짓만 하지 않고 살면 그 인생은 잘 산 거예요. 책 한권, 베토벤처럼 위대한 음악 하나 남기지 않고 가면 어때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있다면 인생은 괴로와도 재미있어요."

10월에도, 11월에도, 올해도, 내년도, 그는 섬으로 떠날 것이다. 회 맛도 모르겠고, 소주도 두 잔이면 더 미련이 없지만, 그래도 시인은 섬이 좋다. 사람이 많아도 외로운 도회지 사람들도 무색하게, 기꺼이 외로워지러 그는 섬으로 간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09/27 14:08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