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골라보는 재미…추석은 영화 '대목'

21세기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는 ‘취향’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다. 적어도 영화에서 이 말은 진리다. 취향에 따라 명작도 ‘본전 아까운’ 영화가 될 수 있다.

추석은 영화계의 큰 ‘대목’. 때문에 이 시장을 노려 아껴 뒀다 개봉하는 영화들이 많다. 관객으로서는 즐거운 일. 입맛대로 골라보자.


봄날은 간다

“은수씨, 술먹다 보고 싶어 전화했어요. 괜찮죠”

떠들썩한 추석이 아니라 스산한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 남자는 여자를 만나서 행복한데 여자는 자꾸 피하려고만 한다. “우리 헤어져.” “내가 잘할게.” 떠난 사랑을 잡으려는 남자와 자꾸 피하려는 여자에게 ‘봄날’은 다시 올까.

‘8월의 크리스마스’로 ‘허진호’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감독이 3년 만에 발표한 영화로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

이혼경력이 있으며, 지방방송국의 PD 겸 아나운서인 은수(이영애),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유지태)는 대나무소리, 시냇물 소리, 갈대 소리를 녹음하다 그들 마음 속에 미세한 사랑의 파동이 일어남을 알게 된다.

“라면 먹을래요.” 이렇게 시작된 인연은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은수는 어느 새 다른 방송진행자와 콘도로 놀러 다니고, 그 남자와의 통화로 시간을 보낸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 말을 하는 상우는 과연 언제까지 그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허진호, 유지태, 이영애 셋이 앉아 있으면 말하는 품새나 분위기가 너무 닮아 마치 ‘삼남매’를 보는 듯한 감독과 연기자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드라마를 뽑아낸 것 같다. “촬영 6개월 동안 아마 4개월은 이야기하는 데 보냈을 것”이라는 게 유지태의 말.

한 두번 아픈 사랑의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언젠가 자신을 떠났던 애인의 심정을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속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조폭 마누라

“은진씨, 낯이 익네요.” “혹시 사채 쓴 적 있어요?”

조폭 남편의 일기. “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참 이상하다. 매일 밤 잠자리를 거부하는 것은 너무 수줍어서 일까. 그런데 냉장고에는 크림빵과 생수, 찬장에는 컵 라면이 전부.

물론 김치라면과 해물라면 선택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여자 하는 말.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새는 “짭새”라나. 두자가 아니라 세자라 했더니,‘씨방새’ 라고. 허걱”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언니를 위해 결혼을 결심한 조폭 차은진(신은경)이 ‘어리숙한 놈’으로 고른 것이 강수일(박상면). 차은진과 강수일의 갈등 보다는 차은진의 ‘사회 생활’이 더 적나라하게 묘사된다.

신은경의 발차기는 예상보다 훨씬 날렵하고 매섭다. 여성 액션의 새로운 전형을 보였다고 할 만큼 액션이 획기적이고, 상투적인 멜로 구성을 빼버린 것도 한결 깔끔한 맛을 낸다.

‘엽기적인 그녀’ ‘신라의 달밤’ 등 잘 만든 오락 영화에 비해서는 한 수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고, 조폭에 대한 접근도 기존 영화에서 보인 수준 그 이상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부담없는 성인 코미디로는 후한 점수를 줄만하다. 등급이 15세 관람가로 매겨지기는 했으나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꽤나 민망할 영화. 어른끼리 가는 게 낫다. 감독 조진규.


러시아워 2

2분마다 웃지 않으면 자존심 상한다

종달새처럼 지저귀는 크리스 터커의 쉴새 없는 입담과 쉰이 가까운 나이에도 절대 대역을 쓰지 않는 성룡의 액션이라면 충분한 ‘피로 회복제’가 될 수 있다.

홍콩 경찰 리(성룡)와 휴가차 들린 LA 경찰 카터(크리스 터커)가 재회하는 순간, 관객은 이미 그들의 만남이 ‘옛 동료와의 조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아 차린다.

사우나에서 적과 맞선 ‘우리의 성룡’, 쓰레기통이며 화분 의자 등 갖가지 실내 기물을 이용해 아크로바트 같은 무술을 보여주다 대나무 비계가 설치된 고층 건물에서의 싸움에서는 요리조리 몸을 놀리는 모습이 현란하기만 하다.

‘24시간 편의점’이란 별명이 붙은 크리스 터커의 ‘음담패설’형 수다는 결코 느끼하지는 않다. 두 악당의 매력도 적은 게 아니다.‘와호장룡’에서 귀엽고 맹랑한 여협객으로 나왔던 장쯔이가 이번에는 표독스런 여자악당으로 나와 환상의 발차기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 황제’에서 비운의 ‘푸이’역을 맡았던 리키 탄이 중년 아저씨가 된 모습으로 나왔다. 그가 맡은 역할은 성룡 아버지의 동료.

47세인 성룡보다 고작 두살이 많을 뿐인데! 영화 끝났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성룡영화의 묘미인 ‘NG 모음’을 보지 않는다면, 영화를 헛 본 것이다. 지독한 예술영화광만 아니라면 누구든 즐겁게 볼 만한 영화. 감독 브렛 래트너.


아메리칸 스윗하트

줄리아로버츠 vs. 캐서린 제타 존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는 당연히 줄리아 로버츠. 그러나 캐서린 제타 존스는 그렇게 생각치 않았던 것 같다.

영화 출연작이야 줄리아 로버츠에 한참 못 미친다 하더라도, ‘마스크 오브 조로’ ‘앤트랩먼트’로 스타덤에 올랐고, 커크 더글러스와의 뉴욕이 떠나갈듯한 화려한 결혼식까지 치러냈으니. 촬영현장 두 여배우의 물밑 경쟁이 만만치 않았던 영화.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커플인 그웬(캐서린제타 존스)과 에디(존 쿠삭)은 뜨거운 사랑을 불태우다 결별한 사이.

그러나 영화사는 영화 홍보를 위해 두 사람의 재결합을 마케팅 포인트로 설정, 그웬의 매니저인 키키(줄리아 로버츠)가 에디의 설득을 맡게 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에디-키키 커플의 사랑을 예감할 듯.

할리우드의 속얘기를 영화로 팔아 먹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영화 속 홍보담당자로 나오는 빌리 크리스털.

“멕 라이언과 왜 ( ‘해리가 셀리를 만났을 때 처럼’) 결혼하지 않았느냐. 꼭 결혼했아야 했다”는 한 외국 기자의 끈질긴 질문에서 힌트를 얻었다. 미국식 유머와 멜로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감독 조 로스


무사

중국사막의 모래 바람과 맞선 아홉 남자들

9월 7일 개봉한 ‘무사’는 추석 시즌을 노리는 작품 중 가장 스케일이 크다. 명나라에 사인으로 갔다 포로가 된 고려 사신의 이야기.

주진모가 고려 장군으로, 정우성이 속량된 노비로 나오지만 사실 이영화의 묘미는 하급 무사 안성기를 비롯, 농부 사냥꾼 다양한 계층의 ‘무사’들이 진정 무사로서의 길을 가게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췄다.

눈에 힘을 지나치게 주는 정우성, 주진모의 약한 카리스마가 다소 완성도를 떨어 뜨리지만 안성기와 박정학 유해진 정석용 등 조연들의 연기와 적장으로 나오는 외롱광의 매력도 한 번 눈여겨 보자.

‘와호장룡’ ‘러시아워2’의 장쯔이가 명나라 공주로 나왔지만 그녀 특유의 매력은 보이지 않는다. 장쾌한 스케일의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울린다. 감독 김성수.


스위트 노멤버

나랑 동거해요, 11월 한달 동안만

언뜻 발칙한 상상의 영화 같지만 ‘느리게 살기’의 아름다움을 강조한 멜로물이다.

샌프란시스코의 잘나가는 광고인 넬슨(키아누 리브스)은 우연히 만난 사라(샤를리즈 테론)로부터 동거제의를 받고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실직으로 상심한 그는 그녀와 동거를 시작,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던 그녀의 삶의 방식에 차츰 빠져든다. 극적인 때에 여자가 ‘시한부’ 생명임을 알게 되는 상투적인 구성이 거슬린다. 젊은 연인들이 볼 만한 영화. 감독 팻 오코너.


프린세스 다이어리

알고보니 내가 공주래요

‘귀여운 여인’의 감독 게리 마셜이 샌프란시스코의 천방지축 소녀를 공주로 만들었다. 제노비아왕국의 여왕인 할머니(줄리 앤드류스)의 방문을 받고, 갑자기 신분이 달라진 미아(앤 헤더웨이).

인기도 없이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던 미아는 공주가 되기 위한 수업을 시작한다. 아이들을 트라프대령집의 7남매와 노래를 부르던 줄이 앤드류스가 퍽 나이든 모습이지만, 우아함은 그대로이다. 가족 영화.


잠깐 메모!

“영화나 보러 갈까”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극장 앞에 도착해보니 아뿔사. 볼만한 영화는 다 매진에다 그저 그런 영화라도 보려니 1시간이나 기다려야? 에이 그냥 집에 가서 비디오 보자.

이런 낭패를 안보려면 ‘3일전 예약 필수’. 영화 티켓 에매 사이트인 ‘티켓파크’(www.ticketpark.co.kr ), ‘무비오케이’(www.movieok.co.kr), ‘맥스무비’(www.maxmovie.com )등을 이용하거나 메가박스(www.megabox.co.kr )나 CGV극장(www.cgv.co.kr) 홈페이지를 이용하면 된다. 씨네코아, 서울극장 등 전화예매를 받는 극장도 꽤 있다. 서두르면 편해진다.

박은주 문화과학부기자

입력시간 2001/09/27 15:48


박은주 문화과학부 jup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