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현의 영화세상] 허진호 감독의 ‘기억과 현실과 영화’

기억은 과거입니다. 그 과거가 현실로 기억될 때 과거는 과장되거나 왜곡되거나 탈색됩니다. 당시 현실과는 다른 정서로 다가옵니다. 그것은 분명 꼼꼼한 일상의 묘사에서 오는 느낌과는 다릅니다. 기억은 단순한 과거의 재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38) 감독은 그 현실의 감정보다 그 기억이 주는 정서를 더 좋아합니다. 가족의 옛날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느낌, 앨범 속의 풍경이나 인물에서 떠오르는 그 때의 감정.

아버지 회갑 날 자그마한 중국음식점에서 어머니가 ‘연분홍치마’를 입고 수줍게 ‘봄날은 간다’를 부르던 어머니의 기쁜 듯하면서도 슬픈 모습과 그 노래를 다시 떠올렸을 때,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외할머니 장례식 날, 화창하게 핀 봄날의 개나리를 보며 슬픈 듯하면서도 가슴이 벅찼던 그 느낌들.

거기에는 지금의 생활이나 삶, 미래의 상상이 주지 못하는 정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친구를 만나 어린시절을 추억할 때 느끼는 그 감정 같은 것 말입니다.

분명 현실과 다른 묘한 감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아픔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간에. 허진호 감독은 그것을 영화 속에 풀어놓습니다. 플래쉬백(회상)이 아닌 현실처럼 일상화 합니다.

그렇다고 그 기억에 푹 파묻히지도 않습니다.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관찰하듯 합니다. 촬영현장에서 연기자들의 움직임을 보고 적당한 거리를 찾아 카메라를 고정하고는 지켜봅니다.

감성을 주관화 하지 않는 그곳을 그는 “주관화도 객관화도 되지 않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일상은 사실묘사의 치밀성이 주는 섬세함이 아니라 기억에 의해 되살아난 감성의 객관화 입니다.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한석규와 심은하는 결국 한번도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석규가 죽은 후 그가 운영하던 사진관 앞에 다시 선 심은하는 그를 찾지 않습니다. 그냥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자기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아마 감독은 울고불고 난리치고 가슴 아파하고 하는 그런 감정보다는 그렇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느낌을 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은, 영화에서 현실이 되고, 그 현실화 한 기억이 주는 느낌은 관객들의 기억을 불러내 ‘나의 얘기의 한 부분’으로 느껴지게 합니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가 다른 일상성의 영화나 통속적 멜로와는 다른 이유입니다. 허진호는 ‘봄날은간다’에서 같은 기억이라도 시간에 따라 그것이 주는 느낌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상우(유지태)가 이별의 아픔 속에서 듣는 녹음된 은수(이영애)의 노래 소리와 아픔을 잊고 편안하게 듣는 보리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처럼.

기억은 지난 것이기에 스스로 담담할 수 있습니다. 굳이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 발버둥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허진호 영화는 냉정합니다. 마지막 재회에서 상우는 은수를 거절하고 돌아서게 합니다.

연기인데도 유지태는 그렇게 못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감독은 “너 왜 그렇게 비장하냐”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허진호에게 “잔인하다”고 하니까 그는 “현실이 아니라 기억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도 복고적입니다. 상상(미래)의 현재화 보다는 추억(과거)의 현재화로 늘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 들 것입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하기에 그의 영화는 또 하나의 기억으로 남습니다.

이대현 문화과학부 차장

입력시간 2001/09/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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