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 '꿈의 무대' 악몽의 홈런포로 참담한 패배

2일 새벽 뉴욕 브롱크스의 양키스타디움 주변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뉴욕 양키스가 이틀 연속 기적과도 같은 역전승을 거두며 월드시리즈 4년 연속 우승에 한발 더 다가섰기 때문이다. 쉴 새 없이 “Let’s go Yankees”를 외쳐대는 팬들이 가득 들어찬 지하철 속에서 뉴욕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스콧 브로셔스, 티노 마르티네스, 데릭 지터등 드라마틱한 홈런포의 주인공에 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더불어 1956년 월드시리즈 사상 첫 퍼펙트게임을 일궈낸 돈 라르센을 비롯, 베이브루스, 조 디마지오, 로저 매리스 등 줄무늬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던 전설적인 스타들도 회상했다.

그들이 ‘양키스 신화(Pinstripes’ Pride)를 들먹이는 와중에 한 낯선 동양인 투수의 이름이 자주 등장했다.


양키스 신화의 조연이 되고 만 김병현

바로 키 작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마무리 투수 김병현이었다. 문제는 그 이야기 속에 오르내리는 김병현이 비극적인 주인공이라는 데 있었다.

월드시리즈 4차전이 열리기 직전. 2, 3차전서 등판 기회를 잇따라 놓친 김병현에 대한 외국 기자들의 관심은 높아져만 갔다.

봅 브렌리 애리조나 감독을 비롯한 동료들은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결같이 김병현은 어린 나이 답지 않게 정규리그나 리그챔피언십서 빼어난 투구 내용을 선보였다”는 등 지나칠 정도로칭찬을 했다.

팀 동료 미구엘 바티스타는 “김병현의 주무기업슛(Up-Shoot)을 칠 수 있는 메이저리거는 없으며 따라서 ‘스카우팅 리포트(Scouting Report)’가 필요없는 유일한 투수”라는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팀 동료 토드 스토틀 마이어는 “신이 어린 그에게 투구능력을 내리다니 이 모든 게 믿기지 않는다”라는 감탄사를 쏟아냈다. 김병현도 “볼끝이 매우 좋다. 자신감이 있다”고 웃으면서 강한 자신감을 드러냈었다. 물론 그 앞에 대기하고 있었던 가혹한 현실을 예측하지 못한 채로.

월드시리즈 4차전 9회 2사 1루. 김병현은 양키스 4번타자 티노 마르티네스를 상대로 패스트볼을 뿌렸다. 평소 때 모았던 힘의 80% 밖에 쓰지 못한 밋밋한 그 볼은 우중월 담장을 넘어가며 3-3 동점 홈런이 됐다.

10회 2사 후 김병현은 지터에게 끝내기 솔로포를 얻어맞고 쓸쓸히 마운드를 내려왔다. 이튿날 치러진 5차전. 김병현은 부진을 씻어낼 수 있는 기회를 한번 더 얻었다. 2-0으로 앞선 9회 말 브렌리 감독의 배려로 마운드에 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투아웃을 잡아놓고, 동점 투런 홈런을 맞아 경기를 그르쳤다.

월드시리즈 전 ‘김병현이 한국인 최초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함으로써 한국에서 김병현은 박찬호(27ㆍLA 다저스) 보다 인기가 높아지는 등 신드롬이 일고 있다’는 기사를 실었던 애리조나 리퍼블릭 등 애리조나 지역 신문들은 일제히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이틀 동안 아웃 카운트 1개씩만 잡아냈어도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는 이미 애리조나 손에 들어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 일부 신문은 중요한 순간마다 김병현에게 볼을 넘긴 브렌리 감독을바보라고 노골적으로 쏘아붙였다.


외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상처 남겨”

AP통신, ESPN 등 주요 외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AP통신의 짐 리트키기자는 중요한 고비서 실투를 한 후 조기은퇴 하거나 자살까지 한 미치 윌리엄스(전 필라델피아 필리스), 도미 무어(캘리포니아 에인절스) 등 비운의 메이저리그 마무리 투수들의 예를 들어 ‘김병현도 이번 상처를 결코 지울 수 없을 것’이라는 극단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ESPN 수석기자 짐 케이플은 1988년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 1차전서 9회 2사 후 커크 깁슨에게 결승솔로포를 맞았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의 잠수함 마무리투수 데니스 애커슬리 보다 김병현이 겪은 고통이 훨씬 더 크다고 단정했다.

케이플은 애커슬리는 사이 영상에다 시즌 최우수선수(MVP)까지 받은 베테랑이었고, 단지 팀 동료들을 실망시켰을 뿐이라는 것.

반면 김병현은 22세로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나이에다 팀 동료 외에 수많은 한국팬들을 실망시켰다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도 우리는 BK를 믿는다

5차전 직후 라커룸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초등학교때 야구공을 잡은 이후 이런 경험은 처음 했다”고 말문을 연 김병현은 “감독과 팀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만큼 감독과 동료들의 신뢰가 컸다는 의미다. 브렌리 감독은 경기 후 4차전서 60개 이상을 던진 김병현을 5차전서 무리하게 기용할 필요성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BK는 우리 팀의 마무리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신뢰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참급 선수들도 김병현을 감싸 안아야 된다고 주장했다. 1루수 마크 그레이스(36)는 “김병현은 어린 아이 아닌가. 우리는 지금 그를 감싸 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트 윌리엄스(35)도 “동정심을 느낀다. 시즌 중에 그는 우리 팀에 엄청난 보탬이 됐다”고 거들었다.

불펜 투수 마이크 모건(42)은 “그가 원하는 대로 선발을 했다면 25승까지 올릴 수 있었다. 동료들이 그를 비난하지 않도록 나 같은 고참들이 그 역할을 맡을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나섰다. 팔꿈치 부상으로 김병현에게 마무리 자리를 내줬던 매트 맨타이(28)는 “김병현은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말했다.

3일 피닉스의 한국 식당에서도 김병현이 단연 화제거리였다. 한 동포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김병현이 4, 5차전 승리를 날려 버린 후 학교에 가기 싫어한다”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김병현이 (올 월드시리즈가 아니면 내년이라도) 꼭 다시 일어서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꿈의 구연’ 월드시리즈에 동양인 최초로 등판한 김병현 뿐만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소망이 아닐까.


"김병현 기를 살려주자"

결혼정보회사인 ㈜ 선우는 11월 4일 대학로에서 `으랏차차! 김병현 선수파이팅' 행사를 열었다.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대학로 샘터 파랑새극장 앞에서 열린 이날 행사는 김병현 선수에게 격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마련됐다.

`김병현 파이팅'으로 6행시 짓기와 김병현의 투구폼 흉내내기 등의 코너가 마련됐으며 엽서에 응원의 메시지를 받아 추후 김병현에게 직접 전달할 예정이다.

선우는 또 홈페이지(www.sunoo.com)에 `김병현 기살리기 게시판'을 마련해 글을 남긴 이들중 50명을 선정, 미팅을 주선하고 결혼까지 성공하면 김병현 경기의 무료 관람권도 제공할 예정이다.

피닉스ㆍ뉴욕=정원수 체육부기자

입력시간 2001/11/07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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