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 이끄는 중국의 갑부들

자본규모·상장속도 폭발적 증가세, 전통산업 강세

“상하이(上海)에서는 돈이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 든다. 손만 뻗으면 잡힐 것 같다.” 최근 시장조사와 현지 적응차 상하이에 체류중인 한 한국인이 전해 온 말이다. 중국을 처음 접하는 한국인들이 종종 빠지는 착각이긴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진실이 포함돼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돈을 향해 앞다퉈 달리고 있는 중국인과 13억의 광대한 소비시장, 타워크레인과 중장비가 줄지어 선 곳곳의 거대한 건설현장, 연안지역 벨트에만 3억5,000만명에 달하는 저임금 노동자 집단, 세계적 불황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경제성장, 외국인 투자유치에 발벗고 나서는 중국정부….

이 같은 중국의 현주소는 이방인으로 하여금 ‘신대륙’에 상륙한 느낌을 떠올리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우선 부자가 되라!(先富起來!)”고 한 덩샤오핑(鄧小平)의 구호에 호응이라도 하듯 중국대륙에는 이제 갑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바이완푸웡(百萬富翁)’으로 불리는 이들 백만장자들은 말할 것도 없이 덩샤오핑이 발동한 개혁ㆍ개방의 산물이다. 이들은 개혁ㆍ개방과 시장경제화의 흐름을 잽싸게 간파하고 이에 올라탄 일종의 선각자들이다. 구멍가게로 출발해 정부의 국유기업 민영화를 계기로 손쉽게 몸집을 불려나간 이들도 적지 않다.


숫자ㆍ규모등에서 엄청난 변화

미 격주간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10월26일 최근호에서 보도한 ‘중국대륙 부호 100대 순위’는 백만장자 탄생이 물결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브스의 조사대상은 모두 민영(사영)기업 대표, 다시 말해 자본가다. 국유기업이나 집체(集體)기업의 재산은 당연히 국가나 집단에 귀속되기 때문에 대상에 넣을 수 없다.

포브스의 중국내 부호 순위 보도는 이번이 세번째. 1994년 포브스가 홍콩의 중문판 잡지 ‘자본가(資本家)’와 공동으로 조사ㆍ발표한 중국내 부호 순위명단에는 겨우 19명만 포함돼 있었다.

자산규모로 보아 순위를 매길 가치가 있는 자산가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의미다. 당시 1위자의 재산은 인민폐 6억위엔(960억원ㆍ이하 인민폐 1위엔은 한화 160원으로 환산), 2위자는 인민폐 5억위엔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난해 두번째 발표에서는 명단이 50명으로 늘어났고, 마침내 올해는 100명으로 치솟았다. 포브스 조사팀은 당초118명의 자본가 명단을 추려냈으나 100으로 숫자를 맞추기 위해 나머지를 뺐다. 늘어난 것은 백만장자의 숫자만이 아니다. 자산의 규모와 자산가의 성격 또한 7년전이나 작년에 비해 현격하게 변했다.

올해 1위자는 사료제조업체인 ‘시왕(希望)그룹’의 리우용싱(劉永行ㆍ53) 회장 형제. 이들 형제의 재산은 인민폐 83억위엔(1조3,280억원)에 달해 역시 1위에 랭크됐던 1994년(6억위엔)에 비해 14배 늘어났다.

아울러 100위 안에 랭크된 부호들이 모두 5억위엔 이상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업인의 자본축적 속도가 폭발적으로 빨라지고 있음을 뜻한다.


IT 기업가 침몰, 부동산ㆍ금융업자 강세

자산가의 성격변화는 우선 IT업계를 비롯한 신경제 리더들의 침몰을 지적할 수 있다. 지난해 각각 20위, 37위, 42위에 랭크됐던 인터넷 업계의 거물 딩레이, 장차오양(張朝陽), 왕즈둥(王志東) 등이 명단에서 일제히 빠졌다.

최근까지 스스로를 ‘지본가(知本家ㆍ지식자본가)’로 부르며 전통산업을 구경제로 우습게 봤던 이들이 전세계적 IT불황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반면 땅장사와 굴뚝산업으로 대표되는 제조업은 여전히 힘을 발휘했다. 100대 자본가 중 25명이 부동산 관련업체의 대표였다. 이어 제약업체 대표 12명, 금융업 11명, 농업 1명, 건설자재업 6명, 자동차 부품업 3명, 오토바이 제조업 3명, 의류방직업 4명, 목재업4명, 에어컨제조업 2명 등이었다. 부동산 관련업자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맹렬한 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중국의 인프라 시설과 주택보급, 도시화등의 추세를 반영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금융업자의 득세다. 투자 등 자본운용을 통해 재산을 증식해 온 이들은 자본시장에 대한 정부의 감독관리 강화, 투명성 확대에 힘입어 더욱 탄력을 얻을 전망이다. 주식과 국채 등 자본시장의 활성화는 이들의 앞길에 청신호를 보내고 있다.

금융업자 뿐 아니라 일반 제조업체도 자본시장 활성화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증시상장을 통한 자본증식이다. 1990년대 말 인민폐 9만위엔으로 한약 약방문(제조법)을 사들인 ‘타이타이(太太) 제약’의 주바오궈(朱保國) 사장은 증시상장을 통해 자산 54억위엔의 백만장자로 부상했다.

올들어 상장허가를 획득한 민영기업은 최소한 13개에 이른다. 포브스가 선정한 100대 부호 중 47명이 상장기업 사장인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상장에 따른 자산가치 상승은 중국 증시가 과열돼 있다는 점에서 거품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10% 정도가 30대 이하 청년재벌

20~30대의 신세대 백만장자가 많은 것도 중국 자본주의의 특징이다. 올해 27세의 펑룬(鵬潤)그룹 회장 황광위(黃光裕)는 창업 10년만에 부호 서열 27위로 뛰어 올랐다. 그의 사업분야는 중국내 최대 가전제품 대리점망인 궈메이(國美)와 부동산업. 100위 내 부호중 10% 정도가 30대 이하의 청년재벌들이다.

포브스의 순위 선정에 대해 피선정자들의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포브스 취재진의 자산가치 평가가 자의적이라며 “중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사영기업이나 주식회사, 농촌지역의 향진기업 자산을 모두 기업주의 개인자산으로 계산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사영기업의 재산권이 명의와 실제간에 미묘한 차이가 있어 서열화에 난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열에 대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기업가들은 선정된 사실 자체는 반기고 있다. 지난해 50위 순위 안에 들었던 한 기업인은 포브스보도 후 50여개의 외국회사로부터 협력관계 요청이 들어왔다며 서열화를 반겼다.

중국의 백만장자 행진은 이제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자본주의화가 진전되고 시장의 파이가 커지면서 백만장자의 수와 재산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이들은 중국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기수들이다. 장쩌민(江澤民) 총서기가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을 언급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타이베이=배연해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0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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