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극단 아리랑 대표 방은미

“한국 연극사의 혁명이죠.” ‘정약용 프로젝트’의 작가 방은미(42)씨가 웃었다.

“지난해 11월 남양주시의 한강변 능내리에 있는 다산의 생가에 들렀을 때, 걸려 있던 싯구 그대로”라고 ‘정약용 프로젝트’의 도입부 대사에 대해 말한다.

단원과 MT 갔다 보게 된 싯구가 자신의 연극 정신과 꼭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풍찬노숙해야 했던 실학자의 불우한 삶을 반영하듯 번듯한 족자가 아니라 아크릴 판에 씌어져 있어, 그의 가슴은 더욱 스산했다. 글중의 시라는 말을 연극으로 바꾸면 곧 자신의 연극관이었기 때문.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 1985년 국립극단에 입단한 촉망받던 배우였다. 자리를 굳혀 가고 있던 그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문제가 크게 닥쳐왔다.

그는 마침내 해외 명작 아니면 철지난 한국 극작품에 매달리던 국립극단을 뛰쳐 나왔다. 1991년 김명곤(현 국립극장장)씨가 대표로 있던 극단 아리랑에 입단하는 길을 택했다.

보장된 생활을 마다하고, 춥고 배고픈 민족극 계열에 투신한 것. 그 결과 현재 그는 “16년 동안 창작극만 해 왔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지금까지 극단 아리랑에서 30여편 했죠.‘점아 점아 콩점아’,‘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 등 히트작도 만들었죠.” 아리랑이 신작을 올리고 사람들을 끌어들일 때마다 당국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방씨 자신으로 보자면 예술가로서의 내면이 충족됐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아무리 잘해봤자, 서양 무대 어법 안에 있다는 한계점 때문이었다. ‘진정한 한국적 연극’이라는 그의 연극적 화두에 대한 해답으로 이 작품을 내세우기까지는 그만한 내연 과정이 필요했다.

이번 작품에서 자신이 직접 작가로 나섰던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다. 불우한 지식인, 다산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 석달 동안 국회도서관을 뒤지는 한편,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주요 저작을 훑어 갔다.

세심한 준비 작업이었다. 드디어 10월 중순, 다산 종친회 산하의 ‘다산 학술 문화재단’이 이번 작품의 대본 심사에 통과했다는 결과를 알려와 그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극단 아리랑대표이자 한국연극협회 이사이다.

장병욱 주간한국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09 11:21


장병욱 주간한국부 aj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