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 보는 사회] 불확실한 미래, 점집 문전성시

정치인들 "어느줄에 서야하나" 상담의뢰 줄이어

6일 오후 서울 모처에 위치한 A 역술인의 사무실. 어렵게 인터뷰를 하고 있는 도중 비서로부터 급히 찾는 전화가 걸려오자 A씨는 기자에게 양해를 구하며 전화를 받았다.

다음은 전화 내용. “오랜 만이야, 무슨 일인데. 아 그 X대령 일 때문이야. 그 양반 진급 된다 안된다 말하기 곤란 한데. (그런데 그 모임에서는 운세가 괜찮다고 했었잖나?) 이 사람아, 어떻게 본인 있는 면전에서 ‘진급은 어렵다’고 얘길 하겠나.

그런 자리에서 (장군진급이)안 된다고 찬물을 끼얹을 순 없잖아. 솔직히 그 양반은 진급 운이 약해요. 물론 브루나이에 간 대통령이 (아세안+3 정상회담을 끝내고 국내에)돌아와 봐야 알겠지만 X대령 운세에는 별을 다는 모습이 약해요. 당신이 잘 얘기해 주게.”

인터뷰를 재개한 뒤 10여분 뒤 또 한 통의 긴급 전화가 왔다. A씨는 모 대기업의 간부로 있는 친구라며 기자에게 전화를 건 사람의 인적 사항을 말해 주었다.

다음은 전화 내용. “반갑네, 지금 손님이 와 있으니까 본론만 간단히 얘기해 봐. 내년 대선과는 별 관계도 없는 자네가 그런 건 왜 물어. 아 그래. 그렇다면 그 사람 쪽에 설 생각이란 아예 말라고 전하게.

거기는 절대 아닐세. 가능성이 전혀 없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안 보네. 자세한 내용 듣고 싶거든 나중에 한번 찾아 오게. 그럼 다음에 전화 함세.”

A씨는 무슨 내용의 전화냐는 질문에 “자기 회사의 오너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한 유력 정치권 인사를 밀려고 하는데 과연 그 사람이 가능성이 있는가를 타진해 온 전화였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들어 이런 문의 전화가 부쩍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IT산업 발달에 비례 점술업 번성

21세기를 흔히 ‘첨단 디지털 시대’라고 말한다. 디지털은 ‘0과 1’의 조합으로 이뤄진 ‘단순성’ 그리고 이런 단순 조합을 통해 사실로 검증된 ‘정확성과 신속성’을 생명으로 삼는다. 현대인들은 단순명료하면서도 과학적인 증명이 뒷받침된 것만을 ‘정보나 지식’으로 여긴다.

이런 디지털화 된 물질 문명 사회가 왔지만 현대인들의 정서는 오히려 더욱 심한 불안감에 휩싸여 가고 있다. 과학 문명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누리면서도 반대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 두려움에 더욱 움츠려 들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라질 것으로 예상됐던 국내 점술 사업이 더욱 번성하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가장 토속적이고 원시적이라고도 할수 있는 점술 사업이 국내에서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산업화와 함께 서서히 퇴조했던 점술업이 인터넷 등 IT 산업의 발달ㆍ보급과 함께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최근 국내 정치 경제 상황이 불안 해지면서 오히려 기존 유명세가 있는 역술인들은 제2의 호황이 다가 올 것으로 내다보고있다. 예언이나 운명, 사주 같은 점술업은 그간 민심이 불안하고 경기가 불황일 때 호황을 맞았다는 전례에 따른 것이다.

군사정권 시대에 이름을 날렸던 몇몇 역술가들은 당시 고위 정치권인사들과 밀접한 유대를 맺고 있었다. 부도덕한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불안한 마음에 스스로의 위안과 안정을 찾고자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찾곤 했다.

자연스레 정치인과 점술가들 간의 연결 고리가 만들어졌다. 또 일부 정권은 용하다는 점쟁이들을 통해 고의로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자기쪽으로 유리하게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한 역술가는 “예전 정권에서 유력자와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세금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며 “지금도 고위 정치인들의 운세를 자주 봐 주는 것으로 알려진 한 역술가는 모 기관의 전담 수사관이 있을 정도”라고 털어 놓았다.

지금이라고 예전과 크게 변한 것은 없다. 요즘 전국의 유명한 점술가나 역술인 사무실에는 유력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여당 대선 후보의 지명 가능성, 내년초 지차체단체장선거 공천, 장관이나 공기업의 단체장 낙점, 검ㆍ경ㆍ군 고위직 인사 문제에서 각종 이권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


정신적 위안·요행 풍조 반영

익명을 요구한 한 역술가는 “전ㆍ현직 국회의원 거의 대다수가 선거를 전후해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공천 가능성과 당략을 점치기 위해 점 집을 찾는다고 보면 틀림 없다. 이들은 본인이 직접 오지 않고 보좌관이나 가족같은 측근을 대신 보내 점을 본다. 일부 의원들은 일과 후 저녁때 음식점에서 따로 만나자고 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역술가가 공개한 주요 고객 장부 명단에는 전ㆍ현직 국회의원과 장관, 재벌 오너, 청와대 직원, 부장 판사, 대학원장, 외교관, 시중 은행장, 경찰 간부, 영화감독, 가수, 탤런트, 심지어는 다른 점술가와 명문대 공학 박사까지 있었다.

이 역술가는 “최근 들어선 ‘누구 뒤에 줄을 서야 하는가’ 하는 상담 의뢰가 가장 많다”고 귀뜸 했다.

강북의 또 다른 역술가는 “재벌들은 복채가 후하고 예상이 다소 틀려도 뒷 탈이 없어 좋은데 정치인들은 복채도 박할 뿐 아니라 재정적 후원자를 구해달라는 등 요구 사항만 많아 반갑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 모 재벌 오너의 운세를 전담으로 봐주는 조건으로 억대의 집한 채를 사례로 받은 적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정치운ㆍ재물운ㆍ애정운 등으로 특화

최근 들어서는 점술업도 특화하는 양상이다. 정치 분야에 능통한 점술가가 있는가 하면 재산 관리나 증권 같은 경제 분야, 연애ㆍ애정 전문가, 건강 분야 전문가 등이 나오고 있다.

강남의 한 역술인은 대박을 터뜨리는 주식 종목을 잘 골라주는 것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국내 점술업계에서 오래 전부터 정평이 나 있는 한 역술인들은1990년대 중반 한때 10여개 대기업의 자문 위원으로 위촉돼 활동했을 정도다.

이들은 회사가 사업상 중요 결정을 내릴 때나 신입사원을 뽑을 때 영향력을 행사한다. 대입 시험에서 뛰어난 염력을 발휘한다고 소문난 한 여성 점쟁이는 이번 수능 시험이 시작되기 4~5일전 학부모들과 함께 강원도의 한 암자에 들어가 단체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한국미래학연구원의 오재학 원장은 “최근 정세가 혼미하고 경제가 위축되면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점술가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며 “점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닥칠 불행에 대해서 미리 대비하고 준비한다는 점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주역학회 회장을 역임했던 김충렬 고대 명예교수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여기에 원리 원칙이 무시되고 노력보다 요행을 바라는 사회 풍조가 만연하면서 사람들이 점술에 의존하고 있다”며 “자신의 운명을 알고자 하기에 앞서 적극적으로 삶에 대처하는 마음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11/13 20:15


송영웅 주간한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