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방배1동 파출소 김종환 소장

장애인과 희귀병환자의 '지팡이'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일단 전철을 타십시오. 총알택시보다도 신속정확한(종종 안 그럴때도 있지만) 국민의 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방배역에서 내리십시오. 그리고 효령대군능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다보면 오른쪽으로 공사를 하느라 맨 흙이 다 드러난 작은 골목이 보일겁니다.

입구에 '방배 1동 파출소 70m' 라는 표지판이 보인다면 제대로 찾은 겁니다. 그 골목안으로 쑥 들어가보십시오. 파출소가 보입니까? 주택가 안에 폭 파묻힌 파출소 맞습니까? 뒤꼍엔 장정 세사람이 팔을 벌려야 겨우 안길까말까한 아름드리 고목도 하나 있어야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거기입니다.

그럼 이 분을 찾으십시오. 파출소에 들어가 맨 안쪽을 쳐다보면 도무지 경찰같이 생기지 않은(!) 분이 경찰 제복을 입고 구석 컴퓨터 앞에 앉아 계실겁니다. 미리 인터넷 동영상으로 확인하고 가셔도 좋습니다. 인터넷 주소는 bangbae1.hihome.com입니다.


푸근한 마음이 전재산인 ‘포청천’

그 분이 소장입니다. 이름은 김종환, 나이 43세, 파출소내에선 '포청천'이라고 부릅니다. 그 분을 붙잡고 고민을 털어놓으시면 됩니다. 단, '급전이 필요하다'든가, '미운 놈이 있는데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다'든가 이런고민은 안 됩니다. 그 분은 가진 거라곤 마음밖에 없는 분입니다. 바랄 수 있는 것만 바라십시오.

김소장 얼굴이 어딘가 낯이 익다면 아마 언젠가 TV에서 보셨을 수도 있습니다. 왜 나왔는지는 좀 있다 말하기로 하고, 그렇찮아도 그 일로 웃지못할 유명세를 톡톡히 치뤘던 김소장입니다.

전국에서 밀려든 수백통의 격려 전화, 백여통의 전자편지, 생사도 깜깜하던 선후배, 친구, 친척 등의 연락까지는 괜찮았습니다. 한 중학교 3학년 남학생은 그날로부터 석달동안 매일마다 인터넷 편지와 핸드폰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해 나중엔 1분 단위로김 소장 핸드폰이 울었습니다.

처음엔 한결같이 자상하게 받아주던 김 소장, 휴가길에도 멈추지않고 날아드는 문자메시지 세례에 결국 두 손을 들었습니다. 문자란 말만 들어도 노이로제에 걸렸습니다. 한 20대의 청년은 '무슨 일이든 하겠다'며 무작정 찾아와 파출소에 눌러 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잘 달래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냈지만, 김 소장에겐 한바탕 홍역이었습니다. 정이 많은 사람들은 이래서 고생입니다. 어쨌거나 외로운 사람앞에 웬만해선 모질게 굴지를 못합니다.

방배 1동 파출소 김 소장은 참 재미있게 삽니다. 신분은 경찰이지만, 살기는 시골마을 동네 이장처럼 삽니다. 바로 옆집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는 날은 파출소에서 커피를 타다 서비스하기도 합니다.

네일 내일없이 오손도손 정답기도 합니다. 파출소 세간살이중 동넷분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것도 죄다 밖에 내놓고 함께 씁니다. 고목 밑의 간이 체육시설도 원래 파출소 옥상에 있던 운동기구들을 김 소장이 내다놓은 겁니다.

예전 방범대원들의 휴식처로 사용하던 작은 건물도 통째로 희귀병 환자들을 위한 사무실로 내주었습니다. 허름한 들마루까지 나무밑 그늘로 나왔습니다. 그 위에 주민들이 앉아 쉬어갑니다.

홀로 힘겹게 사시는 어르신들도 돌보고,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 어린이들의 교통안전지도에도 마음을 쓰는 파출소입니다. 김소장네 경찰가족들의 선행은 소문이 났습니다. 이런 행적으로 언론에 알려졌다가 엉뚱한 고초도 겪은 겁니다.


관공서 아닌 이웃집 된 파출소

사실 파출소 살림이 뭐 변변하겠습니까. 정작 자기들은 TV도 없어 급할때면 옆집에 단체로 출동해 신세를 지기도 합니다. (이 맛에 일부러 안 들여놓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소장이 온 이후 저절로 새 전통도 생겼습니다.

누군가 전입해오면 이사온 집 주인이 인근집 인사도 다니고, 이사떡을 나눠먹습니다. 물론 파출소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관공서이기 이전에 이웃집이 돼버렸습니다. 다들 내 집처럼 드나듭니다.

요즘 파출소 식구들이 우물거리며 먹고 있는 감이나 귤, 그것도 다 동네 주민중 누군가가 또 김소장네먹으라고 들이밀고 간 겁니다. 떠나는 우리 사진기자에게도 가다가 까먹으라며 그 귤 한 웅큼을 쥐어주다 계속 사양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가자 마침 열려있던 자동차 창문 사이로 기어코 귤을 던져넣는 김 소장입니다. 정말 비호같았습니다.

몸으로 수고해 돕는 것은 물론, '사랑나눔방'이란걸 만들어 비록 적은 돈이나마 십시일반 힘을 모아 어려운 주민들을 돕기도 합니다. 김소장을 비롯해 파출소 직원들 전원, 그리고 녹색어머니회원 등이 이런 일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방배 1동은 정말 훈훈한 동네입니다.

사실 김 소장은 그 혼자만 떼놓고 보면 참 심심한 사람입니다. 좌중을 휘어잡는 입담이랄것도 없고, 남다른 위엄으로 제압하는 무엇도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경찰을 보면 일단 좀 무서워해야 이치에 닿으련만, 어째 김 소장을 만나면 동네 초등학교 아이들도 옆집 아저씨쯤으로 밖에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군기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도무지 이 '무게 잡을줄 모르는' 양반이 주민들에겐 더 인기절정입니다.

김소장네 파출소 홈페이지의 만화 캐릭터를 그려준 유명 시사만화가 박재동 화백이 언젠가 김 소장이없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경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었는데 경찰이라는 이 사람을 만나보니 너무나 순박하고 순수해보여서 돕고 싶어지더라.' 너나없이 약아빠진 요즘 세상에 김 소장같은 '멸종 직전의 희귀종'을 봤으니 그랬을 법도 합니다.


지리산 토종 시골촐신

순박하고도 남습니다. 고향부터가 지리산 자락입니다. 청년이 될때까지 서울물이라곤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는 토종 시골 출신입니다. 학교 다닐때도 여학생들에게 짖궂은 장난 한번 쳐 본 일이 없는 '국정 교과서' 소년이었습니다.

경찰이 된 이유도 무덤덤합니다. 그저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1982년 경찰시험을 치르고 합격했는데, 기대이상 더 재미있고 보람도 큰 일이었다고 합니다.

파출소 근무는 아마도 김소장의 업인가 봅니다. 출발부터 파출소 근무로 시작해 지난 20년 경력만 따져보아도 여늬 경찰보다 비교적 파출소 근무횟수가 잦은 편입니다. 맨처음 근무지는 한강파출소였습니다.

1970년대를 뒤흔든 여배우 정윤희의 집도 관할구역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호구조사를 나섰다가 배우 윤미라의 핫팬츠와 요상한 웃옷 차림에 민망해 시종 쩔쩔매다가 돌아온적도 있습니다. 대낮에 한강변에서 스트립쇼를 벌이던 여자를 붙잡으러 나가던 기억도 새삼 아찔합니다.

한 대학의 정보감찰, 남산경비초소 근무를 거쳐 다시 파출소로 발령받았습니다. 그후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주경야독의 과로로 쓰러져 2달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대법원장 공관 경비를 맡으면서 시험을 통해 경사로 승진한 뒤 강서면허시험장에 발령받았습니다.

이때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가슴을 아릿하게 합니다. '전생에 뭔가 장애인과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싶을만큼 지금까지도 김 소장에게 각별한 곳입니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장애인들의 기본적인 운전능력여부를 판가름하는 운동능력측정이었습니다.

일단 이 단계를 통과해야만 비로소 응시자격이 주어집니다. 하루 50-70명씩 시험장을 찾아오는 수많은 장애인들을 보면서 건강한 신체를 갖고 태어난 것이 얼마나큰 복인가, 장애를 가진 분들의 고통과 불편이 얼마나 큰 것인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어렸을 적 갖고 놀던 폭탄이 터져 입은 화상과 파편 흉터로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진 사람, 사고로 두 팔이 절단된 사람 등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장애를 보았습니다. 그렇듯 몸도 성치않은 분들이 생계의 희망을 걸고 운전면허를 따기위해 달려왔을땐 당사자 못지않게 더 애가 타던 김 소장입니다.

경북 영천에서 새벽길을 달려온 한 장애인은 두팔이 없었습니다. 그가 안타깝게도 운동능력측정에서 탈락했을때 김소장은 원래 한번만 측정하게 돼 있는 테스트를 몇번이고 계속 기회를 주며 그가 더 연습해 마침내 통과할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제주도에서 온 한 하지마비 환자는 시험에 실패한 후 본인이 더이상 시험을 안 보려고 하는 것을 김 소장이 직접 수입증지까지 사다붙여주며 계속 시험을 보게 했습니다. 다른 근무지로 전출될땐 후임자에게 따로 부탁까지 하고갔습니다.

어느날 그 하지마비 장애인이 갓 발급받은 운전면허증을 깃발처럼 흔들며 김 소장의 새 근무지로 찾아왔을땐 김 소장 마음도 찡했습니다. 그걸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까지 찾아온 겁니다. 그런 일이 많습니다. 지금도 강서면허시험장에서의 그를 못잊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김 소장이 철썩같이 믿는게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은 반드시 통한다는 것, 진심으로 마음을 준 사람들은 어려울때든, 좋을때든 절대 상대를 잊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전투경찰대, 남영파출소, 원효대교검문소를 거쳤습니다. 청와대 주변에서 왔다갔다하는 경찰들있지요? 그 청와대 202 경비대로도 한동안 근무했습니다.

시험을 통해 경위로 승진, 특수기동대 근무에 뒤이어 작년 2월 옮겨 온 곳이 바로 현재의 파출소입니다. 그사이 수도방위사령관 표창, 서울경찰청장 표창을 받기도 한 김 소장, 객지에 간 아들이 돌아오듯 김 소장은 또 고향같은 파출소로 돌아왔습니다.


고향 같은 파출소 “혼자 힘으로 어림없었죠”

방배 1동 주민은 중산층이 주류이지만 서민적인 동네입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김 소장은 파출소 건물의 도색도 바꾸고, 마을 길도 다듬고, 어려운 주민들의 생활속으로도 팔을 걷어부치고 뛰어들며 하나하나 보이지 않는 담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희귀병인 루게릭병 환자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관내 주민중 같은 병을 앓고 있는 한 환자를 보살피게 되면서부터입니다.

미국의 유명 야구선수 이름을 본 딴 이 질병은 우리말로 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 불리는, 이름만큼이나 복잡하고 무서운 병입니다. 정확한 원인도 치료법도 모릅니다. 서서히 전신의 근육이 마비되다가 3-4년만에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지난 추석 무렵 돌보던 환자로부터 전국의 투병환자들을 위한 협회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은 뒤 마침 비어있던 파출소 뒤꼍 초소를 내놓았습니다. 순찰을 돌면서 마련해뒀던 재활용품과 자신들의 중고 집기 등으로 정성껏 단장하고보니 그럭저럭 아늑한 보금자리가 됐습니다.

'한국 근위축성 측삭경화증 협회'라는 현판이 걸리고, 그 사무실에 가입을 희망하는 환자들의 전화가 하나둘씩 걸려오는 것을 지켜보면서 김 소장은 요즘 환자가족 만큼이나 뿌듯합니다. 단지, 좀 더 재정적으로큰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앞으로 사랑나눔방 회원을 더 늘릴수만 있다면 한결 도움이 되겠지요. 그게 김 소장의 소원입니다.

사실 김소장이 이만큼 행복한 파출소를 꾸리게 된 것은 혼자만의 힘도 아닐겁니다. 인정에 인정으로 화답할 줄 아는 주민들도 있었고, 뭣보다 권위와 기강을 강조했던 종전의 경찰분위기에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국경찰 전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신 분, 그러고보니 방배동까지 오실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주변 파출소부터 먼저 둘러보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곁에도 또다른 김 소장이 있을 것입니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1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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