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이 불 지핀 檢·法 갈등

정재문의원 항소심 선고 공판, 법원 "검찰 증거는 조작된 것"

‘북풍’이 또 불거져 검찰ㆍ법원간의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 4월의 ‘총풍’ 사건 항소심 선고 때와 닮은 꼴이다. 여야도 아전인수격으로 말씨름을 하고 있다.

이번 갈등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위임장을 갖고 북측 인사를 접촉했다고 밝혔던 검찰측 증거가 명백히 조작된 것이라는 법원의 판단에서 비롯됐다.

서울지법 형사항소8부(재판장 김건일부장판사)는 11월9일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의 남북교류협력법 위반 사건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정 의원의 북측 인사 접촉 당시 회의록이라며 제출된 증거는 연락책에 불과한 김양일씨가 입수한 경위를 믿기 어렵고, 합의서상 서명 부분에 가필한 흔적이 있는 등 명백히 조작된 문서”라고 판시했다.

재판부가 검찰측 증인의 증언과 증거를 조작이라며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당초 김양일씨가 내세웠던 증거는 정 의원과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안병순 부위원장의 접촉 당시 회의록과 정 의원이 이회창 총재로부터 받았다는 위임장 사본 등 크게 두 가지다.


조작에 의한 '허위문서' 가능성 시사

그러나 재판부는 회의록에 대해 ▲정 의원과 북측이 한부씩만 보관하는 문서 원본을 연락책인 김씨가 북측으로부터 받았다고 믿기 어렵고 ▲양측 서명 부분에 가필한 흔적이 뚜렷하다는 이유 등을 들며 조작된 문서라고 결론지었다.

재판부는 또 위임장 사본 역시 입수 경위, 문서 형식과 내용, 필적 등에 비춰 ‘진정한 것임을 인정할 수 없다’며 이 역시조작 등에 의한 허위 문서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더 나아가 ‘서신상 A회장이 이 총재’라는 김씨의 증언 역시 과거 진술과 상반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건일 부장판사는 재판후 “김씨의 말은 증언 시점(지난 9월)으로 미뤄 정치적 분위기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재판을 정치 폭로의 장으로 이용한 듯하다”며 김씨 증언의 신빙성을 일축했다.

한편 재판부는 “북측과 우연히 만났다는 정 의원의 주장은 믿을 수 없고 대선 직전 예민한 시기에 접촉해 물의를 일으킨 점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며 “정 의원이 당시 거액을 북측에 제공키로 하고 북풍을 요청했다는 의혹은 인정할 증거가 없고 의원직까지 박탈하는 형은 가혹하다고 판단된다”면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북측에 360만달러를 제공하고 소위 ‘북풍’을 요청했다는 의혹은 있으나 인정할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재판부의 판결을 놓고 정치권의 여야는 물론이고 검찰과 법원간에도 뜨거운 공방이 일어나고 있다.

검찰측은 북풍의 증거로 제시된 자료들이 ‘조작’이라고 결론 지은 법원에 판단에 대해 ‘지나치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서울지검은 판결직후 낸 보도자료를 통해 ‘문서 감정 등을 통해 위조 여부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조작’이라 표현한 것은 지나치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증거를 믿기 어렵다면 ‘수용하기 어렵다’는 정도로 수위를 조절해 판결문을 쓰면 될 텐데 ‘조작’이라는 극단적인 문구까지 쓴것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검찰측은 특히 항소심이 있기 전인 지난달 18일 김씨가 증거로 제출한 자료에 대해 문서 감정을 요청했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조작’이라고 판시한 것은 무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원쪽 판단은 단호하다. 이회창 총재 위임서라는 문서의 형태나 합의서에 가필된 흔적이 너무 허술해 굳이 감정을 받지 않고도 한 눈에 허위임을 알 수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법원측은 검찰이 김양일씨를 증인으로 내세운 것이 오히려 악수(?)였다는 뜻이다.


법원·검찰 정치적 사건마다 마찰

북풍사건 외에도 이번 정권 들어 법원과 검찰은 정치적인 의혹 사건 때마다 마찰을 빚어왔다.

법원은 옷로비의혹 사건 청문회 위증 혐의에 대한 1심 판결에서 이형자씨 자매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김태정 전 검찰청장 부인 연정희씨와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씨,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씨에게 유죄를 판결하며 검찰의 입장을 뒤집었다.

2월 한빛은행 외압 대출 의혹사건에서도 검찰의 공소 내용에도 없는 ‘외압 가능성’을 비추며검찰과 마찰을 빚었다.

4월 ‘총풍 사건’ 항소심 선고와 관련, 장외공방을 벌였던 법원과 검찰이 이와 닮은 꼴 사건인 ‘북풍사건’을 두고 다시 갈등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역시 들썩이고 있다. 법원 판결에 고무된 한나당은 “북풍 사건이 허구로 드러났다”며 배후 조종자의 규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당 3역회의를 열어 “이번 판결로 북풍 사건이 이회창총재를 흠집 내고 야당을 파괴하려는 공작임이 드러났다”며 “민주당은 정치 음해 공작을 되풀이 해온 데 대해 사과하고 대통령은 재발 방지를 약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특검제 도입 강력 요구

한나라당은 12일 국회예결위에서 이번 북풍 조작 사건에 대해 특검제를 도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회창 총재는 “북풍 문제는 검찰이 정치 지향성을 갖고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라며 검찰 지도부를 정면 비판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공세에 대해 “문제의 핵심은 정재문 의원이 대선을 앞둔 예민한 시기에 중국에서 북측 고위 인사를 만나 물의를 일으킨 것”이라며 “민족 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려한 이회창 총재는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장전형 부대변인은 “한나라당의 이런 자세는 남의 집 담을 넘어 물건을 훔치려다 들킨 도둑이 단지 ‘집 구경 하러 왔다’고 발뺌하는 것과 다름없는 후안무치한 행동”이라며 “한나라당과 이총재는 360만달러를 어디서 조달하려 했는지 국민 앞에 낱낱이 밝히라”고 촉구했다.

현재로서는 ‘북풍’ 의혹이 ‘조작’ 의혹으로 바뀐 정도라 할 수 있다. 검찰이 가필 흔적이 있는 문건에 대해 진위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재판부에 진위여부 감정을 요구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야당 총재의 연루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인 이 사건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중요한 문건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하지 않고 재판부에 떠넘기는 식은 올바른 태도로 보기 어렵다.

더구나 증인의 진술과 문제의 문건 제출이 재ㆍ보선을 앞둔 시점에 이뤄졌다는 점도 오해를 살 소지가 없지 않았다. 이번 항소심 판결을 둘러싼 여야간, 법ㆍ검간의 상반된 주장은 대법원의 확정판결로 판가름 나야 한다.

송영웅 주간한국부기자

입력시간 2001/11/14 18:52


송영웅 주간한국부 herosong@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