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궁예형’ 지도자 김정일

남북한 회담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마다 이 책을 산 것을 후회한다. 민족통일연구소 이찬행 연구위원이 지난 5월 펴낸 ‘김정일’이란 책이다. 1,245쪽에 검은 장정을 한 이 책의 정가는 10만원.

특히 금강산에서 6일간 열린 장관급 회담이 결렬된 이후인 11월 14, 15일 양일간 북한 언론들이 쏟아낸 ‘공격’을 보노라면 이 거창한 책의 알맹이가 헛것이 아닌가 생각케 한다. 북한의 조선중앙TV 등 관영언론들은 6ㆍ15 남북정산회담이후 사라졌던 말들을 쏟아 내고 있다.

“이번 회담은 민족보다 외세를 우위에 놓는 남측의 사대주의적 근성 때문에 깨졌다.” 남측 대표였던 홍순영 통일부 장관에 대해서는 “실무진들이 합의한 사안을 뒤집는 망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홍 장관은 ‘평화공존 외는 대안이 없는 만큼 대화는 계속 해야한다. 평화공존은 대결의 시대만큼 관리하기 힘들다는 것을 절감 했다”고 비난을 견디어냈다.

이런 때에 ‘북한학 연구의 학문적 시민권을 얻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이찬행씨가 김정일의 모든 것을 백과사전처럼 담으려고 노력해 만든 ‘김정일’을 구입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사치일지 모른다. 그러나 값이 비싸고 무게가 나가야만 좋은 책은 아닌 것 같다.

지난 9월10일 한국정치학회 일부 회원들은 남북한의 최고지도자에 관한 짧은 논문들을 묶어 책으로 냈다. 이중 김정일 위원장 부문은 서강대 정외과 김영수 교수가 썼다. 그 제목은 “김정일- 궁예형 지도자”다. 45쪽으로 짧다.

제목만으로도 이찬행의 ‘김정일’에서 느낀 후회가 미소가 되어 돌아왔다. ‘궁예형 지도자’라는 여섯 글자때문이다.

궁예는 후삼국 시대에 통일의 선두주자였지만 쿠데타에 의해 쫓겨나 사라진 탈락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혹시 이찬행이 ‘김정일’의 수식어로 ‘왕건형 지도자’로 했다면 어찌했을까 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궁예형 지도자’란 어떤 인물을말하는 것일까. 김영수 교수의 짧은 논문에는 이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리더십 형성과정을 정치 전기학적 관점에서 짤막하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백과전서 식 고찰이 아니었다.

김 교수의 결론은 간단했다. “그의 통치력은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여우와 사자의 양면성을 적절히 갖춘 지도자다. 인민을 엄격한 통제와 감시 하에 두고 인민에게 반항할 수 없는, 속마음을 내놓지 못하게 하는 신민형 정치문화를 만든, 정치를 종교화한 전략자며 정략가다” 였다.

왜 그러면 그를 궁예형이라고 표현했을까. 김 교수는 지난 8월 한창 집필작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의 첫아들로 태어난 김정일이 1964년 대학졸업후 92년 국방위원장이 되기까지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김정일도 ‘합리적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다.

책을 낼 출판사에서 김정일을 요약한 부제목을 원했다. 그때 출판사는 ‘망나니’, ‘플레이 보이’, ‘테러리스트’ 등을 제시했다. 이틀을 생각 끝에 그는 ‘궁예형’으로 스스로 정했다. 그 이유는 길지 않다. 논문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김정일의 성격을 생각해 본 끝에 결론이 나왔다.

“김정일은 자기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면이 강한 사람이다. 그걸 고집하는 사람이다. 인민들의 생각이 자기생각과 같다고 느끼는 오만한 사람,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다. 폭학성이 있다”였다.

김 교수는 또 밝혔다. “나의 궁예에 대한 역사의식은 국사교과서 수준이다. ‘왕건’이란 TV드라마에 나온 궁예도 보지 않았다. 나는 궁예가 자만과 교만, 폭학성 때문에 첫번째로 망한 삼국 쟁패자로 알고 있다.

나는 궁예의 비극성이나 비운성 때문에 김정일을 ‘궁예형’이라고 한 게 아니다. 궁예와 김정일은 통치 스타일과 성격이 어느 정도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궁예는 KBS의 주말 역사드라마 왕건에서 918년, 자기왕국(고려, 마진,태봉)을 세운지 22년만에 왕건의 쿠데타에 쫓겨 철원의 명성산(울웅산)에서 보리이삭을 뜯다 인민의 낫에 찍혀 죽었다. 역사 학자들은 그러면 궁예를 어떻게 조명하고 있을까.

경기대 역사학과 이재범 교수가 낸 ‘슬픈궁예’(2000년 8월 출판)와 대전대 인문학부 김갑동 교수의 ‘태조 왕건’(2001년 4월 출간)은 궁예에 대한 역사학계의 시각을 절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두 교수 모두 후삼국시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두 교수는 궁예를 일본 전국시대 3대 패자(覇者)의 선두주자였으나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지 못했던오다 노부나가에 비견했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를 달래서 울게 만든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울 때까지 기다린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달리 울지않는 새는 가차없이 죽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두 교수는 궁예가 개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나온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하루 100여명을 때려죽인 폭학성에도 공감했다. 궁예는 정치와 종교를 일치 시키고 미륵불 사상으로 인민을 동원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심리 전술가 였던 점에도 동의했다.

김갑동 교수는 궁예의 특질로 인내심의 부족과 권력을 남과 나누는 데에 대한 불안감을 꼽았다. 이재범 교수는 궁예는 서기 905년 영토가 넓어지자 미륵불이라며 백마를 타고 호화행렬을 하며 자만에 빠져 개혁성향을 잃고 패망했다고 보고있다.

서강대의 김 교수를 포함한 세 교수가 궁예에서 발견한 공통점이 있다. “교만한자, 제 멋대로 혼자서 똑똑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자는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용배 언론인

입력시간 2001/11/20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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