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적 대출'이 서민 가계 죽인다

가계부실 위험수위, 대출 연체율 최악·신용대란 조짐

“‘약탈적 대출’ 관행을 개선해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아야 한다.” “신용카드 소지자가 카드를 사용한 뒤 채무를 변제하지 못했더라도 카드회사가 신용정보를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기죄로 처벌할 수 없다.”

전자는 가계부문의 신용대란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경제정의 실천시민연합이 최근 금융감독위원회에 제출한 의견서 내용이고, 후자는‘약탈적 대출’의 한 요소인 카드사들의 ‘사기죄’ 고소 관행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다.

‘약탈적 대출’이란 대출상환능력이 없는 소비자에게 자금을 빌려주고 높은 수수료나 연체료를 부과하거나 담보물을 싸게 취득하는 등의 방법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는 대출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국의 경우 범죄행위로 규정해 다양한 법에 의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경실련은 우선 신용카드업계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지만 은행권도 이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경실련의 이 같은 문제제기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기업부문의 자금경색 조짐에 이어 가계부문의 신용대란 조짐이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구잡이 대출, 신용불량자 사상 최고

가계대출 연체율이 최근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기업대출을 앞질렀고, 금융거래 제약을 받는 개인 신용불량자는 255만명(인구18명당 1명)으로 사상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

기업의 신용대란이 자금조달의 어려움 때문이라면, 가계의 신용대란 조짐은 대출 과잉이 초래한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최근 내부보고서에서 “은행권 등의 가계대출이 우리 경제가 소화할 수 있는 한계치에 도달했다”며 “가계여신의 부실화가 우려되는 수준”이라고 경고했다.

금융기관의 브레이크 없는 대출경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장기침체로 가계의 부채상환 능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 자칫 ‘일본식 소비위축’이 올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1999년 말 이후 2년여동안 금융권 가계대출(신용카드 포함)은 은행 60조원 등 총 100조원이 늘어났다. 4인기준 한 가구당 900만원씩의 대출을 받은 셈이다.

이 결과 은행권 총대출 중 가계대출 비중(40.9%)이 미국 수준(42.6%)에 육박하는 등 포화상태에 달했지만, 금융권은 경쟁적으로 대출세일에 나서고 있다. 일부에서는 휴대폰을 소지했거나, 신용카드 사용실적이 있는 사람, 공과금 납부실적이 있는 사람 등에게는 정식여신심사 없이 간이심사만으로 급전 대출을 해주고 있는 실정이다.

경실련이 지적한 문제점들을 보자. 경실련은 최근 속출하고 있는 신용카드 사용 피해자의 상당수가 ‘약탈적대출’에 해당한다고 주장하며 그 피해 유형을 제시했다.

경실련은 먼저 ‘약탈적 대출’은 대부분 소득을 통한 상환능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신용불량 여부만을 조회한후 카드를 발급해 주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으로 이는 계약 상대방의 궁박을 이용, 이득을 취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므로 결과적으로 신용카드 소비자에게 큰 고통을 준다고 지적했다.

다시말해 상환능력 고려 없는 발급 후 카드회사가 과도한 대출한도를 설정하여 신용카드를 분실하거나 도난당한 경우 타인의 부정한 사용으로 인한 피해가 증폭되고, 자동인출기를 통한 현금인출 한도가 지나치게 높아 카드의 분실, 도난의 경우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연체단계에서의 수수료가 지나치게 높은 것도 카드가 남발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면 역시 ‘약탈적 대출’의 한 유형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카드업계가 연체자금회수만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와 계약, 상환을 독촉하거나, 본인 이외의 가족에게 협박성 전화를 거듭하여 고통을 주는 것, 연체자에 대해 사기죄로 형사고발 하는 등의 행위에서도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서울지법형사 4단독 윤남근 판사는 16일 이 같은 카드사의 ‘사기죄’ 고소 관행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했다.

카드사가 신용카드를 발급할 때 소비자의 신용정보확인 의무를 카드사에 지운 것이다. 이전에는 급증하는 신용카드 연체라는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 대부분 유죄를 인정해왔다. 이번 판결이 상급심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가 주목된다.


경기침체 악순환 부르는 가계부실

현실을 보자. 장기침체로 소득증가율이 둔화하면서 부채상환능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은행권 가계대출 연체율은 8월 말 3.40%에 육박, 환란이후 처음으로 기업대출 연체율(2.97%)을 앞질렀다. 개인 신용불량자수도 9월 말 255만명으로 97년 말(144만명)의 2배에 육박하고 있다.

가계부채가 늘어나는 것은 경제규모 확대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문제는 그 규모가 너무 과도하고 소비진작에 별 효과도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경우 80년대 초호황속에 가계대출이 크게 증가했지만, 개인파산건수는 90년까지 1만명 안팎이었다.

그러나 거품이 꺼지면서 작년 14만명까지 늘어났다. 거품붕괴ㆍ경기침체로 부채가 누적된 가계가 급격히 부실화하고, 가계부실이 다시 금융기관 부실화와 극도의 소비위축으로 이어져 10년 장기불황의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상환능력에 따른 대출한도 설정해야

대출경쟁의 격화로 은행권 가계대출 금리는 작년 초 10%대에서 올 8월 8.0%로 하락했지만, 가계대출 예대마진(대출금리와수신금리 차)은 3.39%로 기업대출(2.68%)보다 여전히 높다.

금감원 관계자는 “적정수준의 충당금 적립 여부 등을 지도하는 것외에는 금융당국이 특별히 할일은 없다”며“그러나 은행권이 지금처럼 충분한 여신심사 없이 가계대출 경쟁을 하는 것은 폭탄을 안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꼴”이라고 말했다.

경실련은 이 같은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먼저 금융기관의 신용정보를 신용불량상태 뿐 아니라 현재 대출금 상황까지 공유하도록하고, 신청자의 소득과 대출상황을 분석하여 가능한 수준까지 한도를 정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신청자가 정보를 공개하고 이를 카드회사가 확인하는 방법으로 상환능력을 판단하게 해 소득능력이 없는 신청자에게는 소액 대출한도를 설정한뒤 사용실적에 따라 장기간에 걸쳐 한도를 높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소득을 통한 상환능력을 처음부터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약탈적 대출’이 발생할 가능성이높고, 이는 곧 신용불량자 급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함께 카드 분실이나 도난시 카드회사는 신고를 받은 순간 이전에는 사용자에게 책임을 묻고 있는데 이 역시 ‘약탈적 대출’ 관행이라 할 수 있으므로 자동인출기를 통한 현금서비스 한도액을 예전과 같이 30만원 이내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이 경실련의 주장이다.

미국에서는 자동인출기를 통한 현금서비스의 한도액이 매우 작다. 이는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큰 금액을 대출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고액을 필요로 하는 고객을 위해서 은행이나 카드회사의 영업점을 통해 본인여부를 확인한후 대출하면 된다.

또 고객이 스스로 사용해놓고 분실이나 도난을 신고하는 것이 예상되나 이는 범죄가 성립되는 것이므로 금융권에서 폐쇄회로 카메라를 설치하는 등의 충분히 대비하면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것이 경실련의 주장이다.

또 모든 카드 거래시 가맹업체에서 반드시 본인여부를 확인토록 의무화해 확인하지 않아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워야한다. 외국에서는 아무리 소액이라도 반드시 본인여부를 확인토록 하고 있다.

높은 연체수수료도 개선되어야 한다. 높은 연체수수료는 상환이 불가능한 경우를 제외하면 카드회사에 높은 수익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 되기 때문에 카드발급을 남발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카드발급 요건 강화 등 제도적 장치 필요

경실련의 대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카드발급 남발과 고액한도 책정- 사용시 본인 미확인- 높은 사고발생과 연체율- 높은 수수료- 신용불량자 양산’이라는 악순환을 초래하는 관행을 ‘신중한 카드발급- 사용시 본인 확인- 낮은 사고발생과 연체율- 낮은 수수료- 신용불량자 발생 억제’라는 선순환을 정착시키는 쪽으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상환단계에서의 부당한 관행을 근절하기위해서는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대부업의 등록 및 금융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조속히 통과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병률 경제부기자

입력시간 2001/11/20 19:40


유병률 경제부 bryu@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