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탐구] (주)동주 조병두 회장

돈보다 귀한 것을 아는 휴머니스트

이런 말을 들을 때, 더구나 그 말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때 취재자는 괴롭다.

"그냥 제가 좋아서 한 일인데 뭔 얘깃거리가 되겠습니까. 저보다더 좋은 일 하시는 분들도 많으니, 죄송하지만 인터뷰는 사양합니다."

꼬박 사흘이 걸려 간신히 연결된 첫 전화통화, 조병두 회장(61)의 첫마디였다. 어찌어찌 인터뷰에까지 이르고서도 그는 한동안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답은 하지만, 자기 자랑만큼은 끝내 피해다녔다. 혼자 한숨을 푹푹 쉬는 나를 보자 '그러게 별로 할 얘기가 없을거라고 하지않았냐'며 빙긋이 미소를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병두 회장을 만나고 싶어한 이유는 여러가지다. 그는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중견기업 (주)동주의 회장으로 지난해 15억원이란 거금을 모교인 성균관대에 장학기금으로 내놓은 주인공이다.

그러나 단순히 고액기부자라는 이유때문에 그에게 끌린 것은 아니다. 그는 돈보다 더 귀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돈쓰는 법이나 생활에 관련해 들리는 주변 이야기들이 그러했다. 아쉽게도, 도무지 '비협조적'인 조회장 덕분에 인터뷰 초반부는 본의아닌 청문회처럼 돼 버렸다.


“성적보다 중요한건 인간성”

- 그만한 돈을 선뜻 장학금으로 내놓게 된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나.

“오래전부터 나중에 돈을 벌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것 뿐이다. 그 장학금도 하루아침에 나온게 아니라 예전부터 조금씩 도와오다가 이 정도로는 안되겠다 싶어 점점 조금씩 불리다보니 그렇게 모인 것이다.”

- 심지어 가족들에게 조차 그 내용을 알려주지 않은 것으로 들었다. 부인이 액수를 알게 된 것도 당일 전달식장에서가 처음이었다고 하는데, 사전에 전혀 얘기하지 않으셨나.

“내가 장학금을 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되는지는 집사람이 몰랐다. 그런걸 뭐 다 얘기하나. 반대는 없었지만 좀 놀라긴 했던 것 같다.”

- 회사내부에서도 한때 말리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인가. 어떻게 설득하셨나.

“일부에서 잠시 말들이 있긴했다. 차라리 그 돈을 회사로 돌려 직원들 월급을 더 올려주는게 어떻겠냐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남들만큼 대우를 안 해준 것도 아니고, 원칙적으로 내가 내 몫으로 가질 수 있는 이익분을 나 대신 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쓰겠다는데 왜 그러냐고 했다. 평소에도 내가 공금 한푼 허튼데 쓰거나 내 개인을 위해 갖다 쓴 일이 없다는 걸 직원들도 알기 때문에 더이상 문제되지 않았다.”

- 누가 장학금을 받고 있는지는 알고 계신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얼굴과 이름을 다 외우고 있다. 작년엔 첫 졸업생으로 10여명이 나갔고, 현재도 10여명이 다니고 있다. 종종 불러서 밥도 먹이고, 술도 마시고 친하게 지낸다. 얼마전엔 아이들을 데리고 등산도 다녀왔다.

일년에 한번씩 아이들이 읽고 싶다는 책도 사주고, 대신 독후감을 써내라고도 한다. (웃음) 이 일을 위해 아예 경영대학원장인 김정남 교수에게 부탁해 한달에 한번씩은 아이들이 김 교수를 꼭 만나도록 했다. 나도 기회가 닿을때마다 만난다. 학비를 대주는 것만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사회에 나갈때까지 제대로 곧게 성장하는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

- 만나는 자리에선 학생들이 조회장을 어려워하지 않는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학생들이 날 어려워할 때는 내가 혼을 낼 때다. 대상자 선정 기준도 그렇지만, 나는 성적보다 인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학생들과 만났을 때도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은 버릇도 고쳐놓는다.

예를 들면, 가령 아이들이랑 식당에서 밥을 먹을때도 손위 어른인 나나 김 교수가 아직 채 수저도 들지 않았는데 먼저 밥에 손을 대는 아이들이 간혹 있다. 그럼 그 자리에서 따끔하게 야단을 친다.

학교 공부만이 공부가 아니라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평소엔 편안하게 농담을 하며 와아 하고 웃기도 하고, 분위기가 좋다.

등산을 갈 때도 '너는 김밥 싸오고, 너는 음료수 가져오고' 하는 식으로 정해주니까 아이들이 가족소풍을 가는 것처럼 참 좋아하더라. 아이들이 이메일로 고민을 털어놓기도 한다.”

( 이런 분위기 때문에 '조병두 장학금' 수혜학생들 가운데는 '다른 장학금도 다양하게 받아봤지만 이런 장학금은 처음 받아본다'고 말하는 학생들도 있다. )

- 후원자가 아니라 거의 아버지 노릇을 하시는 것 같다.

“ 내 딸도 둘이나 있지만, 실제로 내 아이들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장학금도 일부 보조가 아닌 4년 전액으로 지원하는 것도 단몇명을 돕더라도 확실하게 거둬주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운영하자니 숫자가 너무 많으면 내가 다 감당할 수도 없다.”

- 졸업후 취업까지 봐주신다는데, 직접 조회장의 회사에 취직시켜준 졸업생은 없는가.

“ 없다. 나는 옛날부터 나와 조금이라도 상관있는 일에서 돕진 않겠다는 원칙을 세워왔다. 공연히 봉사를 핑계로 사람들을 이용해 먹는다는오해를 받지 않기위해서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은 별 것 아니다.

지금도 학생들에겐 '너희들도 나중에 졸업하고 취직해 돈을 벌거든 그땐 너희들 역시 다만 얼마씩이라도 돈을 내 어려운 후배들을 도와야한다'고 말해두고 있다. 도움을 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 스스로도 도움을 나눠줄줄 아는 아이들로 만들고 싶다. 그런 세월이 계속 쌓이면 지금보다 훨씬 따뜻한 사회가 될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한결 같은 마음’

조회장의 젊은 시절, 지금의 자신과 같은 후원자를 만났다면 그의 삶은 또 어떻게 변했을까? 성균관대 58학번 상학과 출신인 그는 그 자신이 어렵게 공부했다.

한국전쟁으로 부친을 여의고 사실상 소년가장 노릇을 맡으면서 평생 자신의 학비는 물론 집안의 생계와 네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단한 길을 걸었다.

대학시절 역시 학교와 일터를 오가며 힘겹게 마친 뒤, 1962년 현대건설에 입사, 그후 현대자동차를 거쳐 KCC(금강고려화학) 상무로 직장생활을 그만두기까지 약 18년간 대기업에 몸 담았던 경력이 있다.

퇴직한 것은 30대 나이에 임원직에 오를만큼 한창 잘 나가던 시기, 흉추와 척추를 다치는 큰사고를 당하면서 주위의 만류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직장생활을 접었다. 회사에선 휴직기간을 늘려주면서까지 머물러 있어주기를 바랬지만 '오랫동안 공석으로 폐를 끼칠수는 없다'며 자청해 물러난 것이다.

그후 얼마뒤 자신의 사업을 시작해 21년간 키워놓은 것이 현재의 회사다. 계열업체 4개, 업계 상위권에 들만큼 우뚝 세워놓기까지 기업인으로서 겪은 고생도 진하다.

그 과정에서도 조 회장의 청렴성과 신용은 안팎으로 소문이 나있다. 대기업에서 나올 당시 그를 뒤따라 나온 동료는 지금도 사장직을 맡아 창업때부터 오늘날까지 수십년째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하고있다.

그외에도 30여년전 신입사원이 아직도 그를 찾아오는 등 인간적으로도 '한결같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돈은 합리적이고 효울적으로 써야”

- 가정 이야기를 들어보자. 돈 잘 버는 가장답지않게 집에선 아직도 20년 넘은 냉장고를 쓰는 등 무척 검소하시다고 들었다.

“ 뭘 그런 걸 물어보나. (웃음) 그냥 특별하게 뭘 아낀다기보다 쓰기에 멀쩡한 것들이라 잘 안 버리는 것 뿐이다. 고장나면 고쳐서 쓰고, 완전히 망가지기전엔 웬만해서 버리지 않는다.

사무실에 있는 저 앰프도 50년쯤 된 건데 옛날에는 고물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그것도 골동품이라고 이젠 일부러 저런걸 사려고 쫓아다니는 사람들도 있더라. 그러게 진작 내버리지말고 잘 쓰지 왜 저러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 자녀분들도 엄하게 키우셨다고 들었다. 돈 씀씀이도 통제를 하시는가.

“ 꼭 필요한 돈은 다 준다. 다만 무엇을 사든간에 세번은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래도 꼭 써야된다는 판단이 서면 내게 말하라고한다. 그렇게해 보면 대부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진다.

'생각해보니 필요없더라'며 친구것을 잠깐 빌려쓰니 해결됐다는 것이다. 사실상 우리가 쓰는돈 중엔 잘 살펴보면 꼭 필요한 것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돈을 무조건 아끼는게 아니라 합리적으로, 효율적으로 돈을 쓰게 하는것 뿐이다.”

- 본인의 노후설계에 대해선 따로 준비하시는 게 있나.

“그런 것 없다. 내겐 일도 있고, 앞으로도 먹고 살 만큼만 있으면 되지 뭐가 더 필요하겠나. 어차피 돈이란건 아무리 많아도 다 쓰고 갈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에게 유산으로 물려줄 생각도 없다.

그건 오히려 아이들이 제 스스로 세상을 살아갈 힘이나 창의력을 망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조금이야 도움을 주지않겠는가마는, 유산이라고할 만큼 큰 돈을 남겨줄 생각은 없다.”


나누려는 마음으로 가득한 인생

그는 서울팝스오케스라 이사장도 맡고 있다. 오래전 우연히 음악회에 갔다가 그들의 연주에 매료돼 당시 운영난에 처해있던 오케스트라를 추스려 지금까지 후원을 맡아온 것이다.

단원과 직원을 합쳐 약 80명 규모, 공연횟수가 연 100회에 이르는 사설 오케스트라로 개인이 후원하는 연주단으로는 유일무이한 성공케이스다.

그 연습실겸 사무실도 자신의 회사 빌딩 한켠에 마련해준 그는 개인적으로도 음악과 미술등에 애정이 많다. 다소 썰렁한 사무실 복도와 집무실 내부 등 곳곳에 조각품을 세워놓았고, 한때 직접 오보에를 배운 적도 있다.

실력만 연마한다면 오케스트라 무대에도 끼워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지만 초보단계에서 헤매다 현재 '휴학중'. 평소에도 회사에 머물때는 항상 음악을 틀어놓는 등 여러모로 왕성한 60대다.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 가면 학교측에서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명명한 '조병두 국제홀'과 조 회장 흉판도 자리해 있다. 남 앞에 생색내는 일은 하라고 해도 못하는 그가 어쨌거나 학교에서 들이민 이 선물을 받았을땐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핸드폰도 없이 다니는 조 회장, 말단 직원 것보다도 더 작은 자신의 책상앞에서 그는 요즘도 장학생들과 이메일을 나눈다. 떠날때쯤 나누던 이야기 어느 대목에선가 그는 '도와줄 곳을 더 찾아낸 곳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도 '다음엔 어디냐'고 묻자 또 입을 다문다. 맨처음 '나누려는 마음만 있으면 도울 곳이 천지'라던 그의 말이 아마도 그 뜻이었던 모양이다.

정영주 자유기고가

김명원 사진부 기자

입력시간 2001/11/2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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